<팔공시론>청백리 신당(新堂) 선생을 만나다
<팔공시론>청백리 신당(新堂) 선생을 만나다
  • 승인 2009.10.1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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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성 삼 (언 론 인)

청백리(淸白吏)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직(首職)들이 추첨하여 뽑은 벼슬아치들을 가리킨다.

청백리에는 당시 유교적 지도 이념과 주자학적 실천 수행의 도(道)에 철저했던 인물들이 선정되었다. 공직자 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청렴, 근검, 도덕, 경효(敬孝), 인의(仁義)등을 중시했다.

이 정신은 국가에 대한 사명감과 왕조체제에 대한 충성심, 백성을 위한 봉사정신 등이 개인적인 생활철학으로 정립되어 공직자의 국가 윤리관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되면서 이러한 청백리의 사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인지 최근 언론 매체를 온통 비리와 관련한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근대화시기에 문명적 사고(思考)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민족 문화의 의(義)를 숭상하는 정통적인 정체성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서구적인 것만이 우월적 문명이라는 인식 부족으로 생긴 문화이다.

물질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청백리가 나오기 어렵다고 하겠으나 체념해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 청백리와 탐관오리에 대한 관리제도가 엄격했던 것은 전근대적 시대에는 행정규정이 완비되지 않아 관리들의 재량에 맡겨진 일들이 많았고, 특히 지방관들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백성들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방지의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청백리로 선정된 사람들은 전고대방에 219명, 청선고에 186명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많은 청백리 가운데 권문세가에도 당당하게 버티면서 올바른 공직자의 처신을 견지했던 조선시대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붕은 세조 12년(1466)에 태어나 한훤당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성종 23년 (149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연산군의 무도함을 만나 교리(校理)로서 일을 논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후에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가던 중에 병이 나서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 벼슬을 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영의정 성희안이 임금께 천거하여 “정붕은 순후하고 정직한 선비입니다.

현사(賢士)가 시급하오니 오랫동안 고향에 있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그를 다시 부름으로 할 수 없이 교리로 복직되었다가 외직(外職)에 나와 청송부사로 고을을 잘 다스리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정붕이 청송부사로 있을 때 중종반정 때 주역으로 정국공신이 된 성희안 영의정이 신당에게 청송에서 많이 나는 잣(松子)과 벌꿀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붕은 “잣나무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벌꿀은 백성들 집안의 벌통에 있는데 부사로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물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松在高峯頂上 蜜在村家桶中 爲太守者何由得之)”라고 재치 있는 답변으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런 답변을 받은 성희안은 부끄럽게 여기고 한 나라의 영의정이라는 고관이 한 고을 수령에게 사과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채재공이 찬(撰)한 정붕 비문의 명(銘)을 옮겨 적는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 항언(抗言)하다가 유리(琉璃)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 기(氣)가 신기하고 그 의(義)가 정밀한 이는 바로 선생이었네.”

다산의 목민심서를 조명해 보면 낙시(樂施)조하에 “권문세가라고 하여 후하게 섬겨서는 안 된다.(權門勢家 不可以厚事也)”는 원칙이 천명되어 있다. 이 원칙은 아무리 높은 상관이라 해도 그 요구가 바르지 못하고 부당한 내용이라면 의연히 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다.

대만 정부의 20세기 전반기 중국대륙의 장졔스 국민당 정부는 부정부패로 유명했다. 국민당 내부의 부패가 `물 반, 고기 반’으로 표현할 만큼 부패관리로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장졔스가 부정부패의 심각성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를 놓쳐 수습할 길이 없어서, 결국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났다.

그 후 대만 정부는 1963년에 제정한 부정부패방지법에 따라 불법금품수수와 횡령죄를 저지르는 공직자를 극형에 처하자 공직비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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