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미술, 자연으로 걸어 들어간 예술
대지미술, 자연으로 걸어 들어간 예술
  • 승인 2016.04.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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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주 미술평론가
길을 따라 놓인 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돌 하나가 길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대지미술가 리차드 롱(Richard Long, 1945-)의 작품이다. 롱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걸었고, 걷다가 멈추었다. <164개의 돌로 된 선, 164마일의 걷기>라는 제목에서 1마일마다 멈춰서 주변의 돌 하나를 길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으며 164마일을 걷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다. 그렇게 그는 길에서 만난 돌이나 잔디, 물로 자연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풀숲을 걷기도 하고 사막을 지나기도 한다. 그가 걸어간 자취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선이 된다. 걷기 도중에 만들어진 돌의 배열이나 대지 위의 흔적, 바위에 그려진 물의 형상들은 걸음을 걸으면서 ‘걷기’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이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의 생성, 변화, 소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롱은 오브제가 경험과 겨룰 수 없다는 철학적 명제에 주목하여 자연물을 오브제로 삼지 않았다. 발끝에 닿는 돌들의 부딪침, 살갗을 스치는 바람결 속에서 경험한 세계를 그는 담고자 한다. 그에게 예술은 경험이다. 롱에게 걷기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주객이 합일되고 모든 분리가 극복되어 자유롭게 노니는 소요유의 경지를 떠올리게 한다.

1967년 걷기를 이용한 롱의 첫 작품, ‘걸음으로 생긴 선’은 들판을 걸어간 걸음이 만든 흔적이다. 대지, 잔디, 사람의 걸음, 태양빛 등으로 이루어진 형태와 그 형태에 의해 확보된 장소가 하나의 작품을 형성한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서 주변의 돌이나 나뭇가지, 뼈, 풀 등을 원이나 직선 형태로 재배치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걸어간 길 어디쯤에 자리한 돌들은 이내 누군가의 발에 채이거나 바람에 밀려갔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에 없던 것을 남기거나 새로이 포함하지 않으며 대지를 훼손시키지도 않는다.

이처럼 롱은 자연을 모방하는 작품의 결과물로 사진이나 글, 비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그의 경험을 전한다. 그는 단어들 안에서 걷기의 경험을 만회하고자 한다. 그는 사진작업으로 남기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기록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의 작업은 아무도 불 수 없는 외딴 곳에서, 혹은 단지 몇 초 동안 존재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데 의미가 있다. 즉 그에게 사진 작업은 외딴 곳에 외롭게 있거나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사실적 근거물이다. 그에게 그것은 지도나 글 배열작업과 함께 또 하나의 순수예술이다.

롱을 비롯한 대지미술가들은 시간을 형태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고 작업을 한다. 대지미술 작품은 제작 과정뿐만 아니라 재료 자체가 지닌 물리적 속성에 의한 변화 과정을 작품의 내용으로 담는다. 이로 인해 미술가는 생산자로서의 주체적 위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작품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에 작가와 작품 간의 종속 관계는 무너진다. 뿐만 아니라 시간은 행위를 동반하여 관람자와 소재, 환경과의 상호 관련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현장을 함께 하는 관람자가 있다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늘어놓은 돌과 돌을 늘어놓는 작가의 행위, 관람자의 행위도 더해져야 한다. 관람자는 더 이상 한자리에 서서 작가가 전해주는 내용을 전달 받을 수 없다. 시간은 또 다른 공간을 만들고 관람자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또 다른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상품으로 진열되는 미술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으로 걸어 들어간 예술은 역설적이게도 미술의 위상을 다시 세운다. 대지미술은 물질화되고 시각화된 예술을 탈피함으로써 기존의 한정된 전시 공간을 깨고 나왔다. 그것은 형식적이고 인위적인 예술 행위의 결과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작품으로 인해 자연까지 지각하게 만들었다. 대지미술은 작품과 그것을 보고 체험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생기는 관계에 주의를 환기했던 미니멀 아트와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의 발전과 관련된다. 또한 장소와 규모면에서의 특성으로 사진의 형태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대지미술 작품은 전통적 형태의 작품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낱말, 문자, 사진 등에 의한 개념미술이 전개되도록 했다. 1960년대 후반에 선보인 대지미술은 기존의 미술관행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성찰을 모색한 전위적인 사조로 평가 받는다. 자연으로 내디딘 리차드 롱의 걸음도 그 일상적 행위로부터 예술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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