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의 선택과 중심
노출의 선택과 중심
  • 승인 2016.05.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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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
미술학 박사
창틈으로 스며든 봄바람에 냉기가 서려있다. 교탁 앞에 앉은 한 여학생이 찬 기운에 몸을 떤다. 보다 못한 나는 스카프를 풀어 건넸다. 학생은 무안한지 고맙다는 말 대신 “거추장스러워서요.” 라며 차갑게 거절한다.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로 한껏 멋을 낸 여학생에게 내 배려는 오버였던 셈이다. 당사자는 개성인데 오지랖 넓은 내 참견이었다. 짧은 치마가 유행한 후 종종 마주하는 광경이다.

문명시대를 사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옷으로 가려졌다. 그러나 미술사는 인간의 나신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룬지 오래다. 누드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그리스시대부터다. 그리스시대 화가들은 대개 여신을 그렸다. 인간의 격과 다른 신의 영역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인의 누드가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소재, 주제, 비례 등의 규칙을 준수했던 그들은 수치로 계산된 비례에서 인간의 몸이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길 원했다. 다듬어진 외관은 사람의 눈을 편하게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한편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노출을 꺼리는 문명임을 암시한다. 문명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문명이 제거된 모습,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보기를 거북해 한다. 그래서 문명의 옷을 입은 자신을 불편하다고 하기보다 벗은 몸을 민망해 한다. 어쩌면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에게 내가 건넨 스카프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건강을 염려한 마음 이면에는 윤리·도덕적 관념이 내재하지 않았나를 돌아본다.

화가들은 대개 인간의 도덕적 관념 속에 가려진 비도덕적인 모습도 본다. 겉치레를 걷어내고 솔직함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드화에서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예가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의 ‘올랭피아(lympia, 캔버스에 유화, 130х190㎝, 1863년, 파리 인상파미술관)’다. 이 그림은 1865년 아카데미살롱에 출품되어 입선을 했지만 처음 전시장에 걸렸을 때 강한 비난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우러러볼 여신도 귀부인도 아닌 화류계 여인의 맨몸이라는 이유였다. 마네는 여인의 나신을 그린 것도 모자라 하나를 더 벗겨냈다. 바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가식과 상류층이 입은 허영의 옷이다.

옷은 몸을 보호하고 예의를 갖춰주며 체면도 지켜준다. 나아가 치장과 포장까지 돕지만 진실을 가린다는 것이 화가의 입장이다. 그래서 화가는 하나의 인격체를 가린 문명의 껍데기를 과감하게 벗겨버렸다. 문명으로 인한 도덕적 관념과 일반적인 잣대에 길들여진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새롭게 눈 뜨도록 한 것이다. 허구인 예술이 가끔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마네는 여인의 나체를 한낱 눈요기 대상이 아닌 하나의 사실적 인격체이자 진실을 드러내는 주체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가려진 곳을 벗겨내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엔 많다. 작품도 그렇다. 가끔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때가 있다. 작가에 대한 정보는 작품을 이해하는 단서로써 중요하다. 하여 작품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내가 꼭 거치는 절차이다. 난감할 때는 작가가 경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다. 이를테면 모 단체장이라든가 대표이사, 회장, 심사위원, 수료증, 잡다한 전시와 수상경력에 인맥까지. 존중해야할 것은 빼곡한 경력보다 진정성 있는 한 점의 작품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아는 작가다. 다만 작가들도 사회적 통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웃픈 현실이다. 실적을 겨냥한 전시회도 실적전일 뿐 예술작품전이라 이름 하기엔 왠지 씁쓸함이 크다.

유행가 한 구절이 생각난다. “…10년은 돼야 가수라고 하지, 20년은 돼야 스타라고 하지, 30년이 되면 레전드라고 부르지, 그래서 이렇게 난 아직도 배가 고프지…” 는 가수 박진영이 부른 노래의 일부분이다. 진정 가수, 스타, 레전드를 꿈꾸고 경험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 아닐까. 작가도 마찬가지다. 작품은 작가의 민낯이고 작품전은 영육을 노출하는 행위 다름 아니다. 관객과 소통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작품이 내면의 거울임을 자각할 때 다양한 노출행위는 신중해질 것이다. 미니스커트든 SNS의 활용이든 무엇을 왜 얼마만큼 노출시키는가에 진중할 때 그 의미와 가치도 달라질 것이다. 선택은 자유다.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중심이 주요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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