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初夏)의 맛
초하(初夏)의 맛
  • 승인 2016.05.1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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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자연요리연구가
비 내리더니 건듯 부는 바람에 쨍하고 볕이 난다. 등을 데우던 반가운 봄볕이 아니라 이제는 눈부신 여름 볕에 가깝다. 볕을 찾아 종종거리던 걸음이 손차양을 이마에 대고 마당에 나서야 하니 오월이 오긴 왔나 보다. 있는 대로 볕을 빨아들이던 몸이 어제 같은데 그새 볕을 가리기에 바쁘니 오살 맞게 간사한 우리네 마음이다. 가는 계절은 아쉽고 오는 계절은 또 걱정이라 쨍한 볕을 보고 또 본다. 입하(立夏)가 코앞이니 봄맛은 서서히 기울고 여름 맛이 밥상을 채우겠다. 쌉싸래한 봄나물에 취해 있던 입맛도 더워지는 날씨에 따라 시원한 것이 그리워지고 밖이 뜨거워지니 몸이 찬 것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몸이 원하는 대로 여름 찬을 구하러 머위 잎에 찬밥 몇 덩이 돌돌 말아 산에 오른다. 찬밥이 싫지 않은 계절이니 여름이 왔다는 증거다. 아직은 숲이 우거지지 않아 벌레도 창궐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길이 훤히 보여 산을 오르기 딱 좋은 계절이다. 숲이 짙어지고 넝쿨이 엉키기 시작하면 대낮에도 어두워 혼자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도화(桃花) 진자리에 벌써 붕어 눈알만 한 복숭아가 열렸고 으름 넝쿨에 보라 꽃이 한창이다. 그늘진 넝쿨 아래 서서 초록 잎 사이로 번지는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니 방울 같은 꽃이 금방이라도 맑은 종소리를 낼 것 같다. 자연은 저 혼자 피고 질뿐이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일과 무관하게 때맞춰 꽃 피우고 열매 맺을 뿐이다. 부지런히 움직여 자연이 주는 저 귀한 맛을 다 받아내야 하는데 종일 부지런히 뛰어다녀도 껴안을 품이 모자란다.

연한 칡잎을 따고 찔레순도 꺾는다. 아직 초록이 되기 전에 연두라 순하고 보드랍다. 여린 잎이 지닌 부드러움을 즐기기에는 지금이 안성맞춤이다. 오월 단오가 가까워지면 태양의 기운이 강해져 푸성귀들이 거칠고 억세 진다. 푸른 기운이 왕성해지기 전에 요모조모 음식 재료로 저장해둬야 겨우내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등에 땀이 나도록 산을 한 바퀴 돌고 소나무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펼친다. 나무 사이를 오가는 적당한 바람과 서서히 식은땀과 노동 뒤에 오는 고단함이 섞여 찬밥 한술이 그저 꿀맛이다. 다시 능선을 넘고 계곡을 지나 어스름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온다.

오자마자 풀물을 끓인다. 찹쌀가루와 생콩가루를 함께 넣어 탑탑하게 끓여 식혀두고 칡잎은 깨끗이 씻어 차곡차곡 쟁여둔다. 소금에 절이지 않고 생 칡잎으로 물김치를 담으려면 풀물은 좀 간간하게 간을 잡고 익었을 때의 간기를 미리 계산에 넣고 물을 잡아야 겉돌지 않고 맛있다. 갖은 양념과 매운 홍고추를 갈아 넣고 채소나 과일을 곁들여도 된다. 콩가루가 없을 때는 된장을 한술 풀어 담가도 구수하고 맛있다. 푸른 칡잎의 거친 식감을 된장의 콩 단백질이 감싸줘서 혀에 감기는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산을 올라 따고 씻는 과정이 수고롭기야 하지만 적당한 노동을 투자하고 나면 맛은 떼 놓은 당상이다. 시장가면 곳곳에 나물이지만 자연산을 즐기려면 아무래도 품을 좀 들여야 한다. 돈 주고 산 것과 내 손으로 장만한 식재료가 맛과 기분에서 벌써 “다르다”라는 절대 믿음이 내가 나를 잡을 때도 있다. 하지만 푹 익은 김치 한 사발을 마주하면 여름 찬으로 이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묵직한 근본이 느껴지는 국물은 익으면 익은 대로 밥을 부르는 찬(饌)이다.

모시고 온 으름 꽃은 당침과 염장에 번갈아 재워 그늘에 말린다. 말리는 내내 달큼한 꽃 향이 집안에 맴돈다. 말리니 보라 꽃 색이 좀 더 짙어져 겨울에 흰 강정에 올리면 어울리겠다. 천일염 사이사이에 얼추 말린꽃을 넣고 미리 다가올 계절을 준비한다.

엄나무 순과 두릅은 채소로 달인 맛 간장에 담그고 작은 몽돌로 꾹 눌러둔다. 찔레 여린 순은 겉껍질을 벗겨내고 살짝 데쳐 떫은맛을 우려내 장물에 담근다. 껍질 벗기는 과정이 힘들지만 여름 한 철 입맛 없을 때 시원한 냉 녹차에 밥 말아 찔레 순 한 점 올려 먹으면 밥이 미끄러지듯 입안에서 사라진다. 물에 만 밥에는 뭐니 뭐니 해도 장아찌가 최고다. 심심한 물밥에 짭짤한 간기가 어우러져 서로 격이 맞고 처지지도 넘치지도 않는 초하의 맛이다. 여기에 배리배리한 말린 생선이나 조개젓이라도 곁들이면 말해무엇하겠는가. 맛없을 리 만무하다. 가는 봄을 오달지게 장만해 두고 누렇게 보리 익기를 기다린다. 느티나무 숲이 살이 올라 푸른 파도로 출렁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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