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관행’
불편한 ‘관행’
  • 승인 2016.05.2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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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 대구미술비평연구회·미술학 박사
90년대 초였다. 찬 겨울밤 자정이 넘도록 실기실에 켜진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허기를 달래려 큰 양은주전자에 끓인 라면을 나눠 먹던 시절이다. 동기들은 순수했으며 진정한 예술가를 꿈꾸었다. 삼수는 물론 칠수가 있을 만큼 화가를 열망하던 이들의 묘사력은 탁월했고, 모름지기 화가는 작업으로 말하겠다는 의지가 지배적이던 때, 묵언정진 하라는 스승의 훈육 또한 금 같은 채찍이었다. 초석을 다지던 그 시간은 수행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작품이 상품과 다른 것은 산고의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라던 말이 뼛속 깊게 파고든 때는 내가 미술을 막 알아갈 바로 그 즈음이다. 창작의 물꼬를 튼 시기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 후 여러 해가 갔다.

동·서양을 통틀어 미술사는 다양한 행보를 재촉한다. 모방에 차용은 물론 패러디parody와 패스티시pastiche 오마쥬hommage 등, 다양한 행태가 이젠 낯익다. 금단의 열매들은 삼켜졌다. 전문가와 아마추어, 예술성과 상업성의 경계마저도 희미하다. 미술계와 자본의 논리 가 맞닿은 지점에서는 법의 개입이 불가피한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봇물처럼 쏟아진 현대미술의 반란에 사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대중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술에서 놓치고 가는 것은 없는지를 되묻는 듯하다.

지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공유하고자 매달 한 번 모 신문사 잡지 일면을 채우던 때가 있었다. 지난 2011년이다. 나는 고유한 예술세계를 깊게 고민하는 작가들을 찾아 나서곤 하였다. 조수도 없이 6미터 FRP 파이프에 수천 개의 구멍을 내던 조각가와 들판에 앉아 해 저물도록 물감을 풀던 화가를 만났다. 파이프에 뚫은 수천 개의 구멍으로 흘러든 땀방울과 수만 번의 붓질은 유희보다는 숨 가쁜 예술노동이었다. 그 노동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견줄 바가 아니다. 발상과 도구, 작가와 작품을 이분법으로 나누어서도 그 가치는 무색해진다.

그들의 자부심을 기억한다. “내가 진실하면 작품도 그래요. 사유가 깊으면 진중해지지요. 땀 흘리며 다양한 방도를 생각합니다. 직관은 순수할 때 더 빛나고 작품도 그래야하지 않을까요? 그걸 봐 주는 눈을 원하고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삶을 온전히 저당 잡힌 채 간구해온 그들의 예술작품은 혼신을 다한 작가가 완성작의 주인임을 실감케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가난한 예술가를 쉽게 인기작가의 반열에는 올려놓지는 않는다. 하여 수십 년의 생활고를 감내해야만 하는 작가들이 이 땅에는 많다. 아둔할 만큼 침묵과도 같은 예술을 지켜가는 작가들이 수두룩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수면에 이는 파문처럼 바람 잘 날 없는 미술계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살아있음의 진정한 의미를‘화육법畵六法’에서 찾아본다. 중국 남제南齊의 인물화가인 사혁謝赫 479~502이 정리한 육법은 오랫동안 중국 화평畵評의 기준이 되었다. 그 첫 번째가 기운생동氣韻生動인데, 작품에 깃든 혼이 핵심인 기운생동은 기술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 화육법을 모태로 현대미술작가의 기본 강령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 적도 있다. 바로 ‘칠위일체七位一體’의 예술이다. 실은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의 <성삼위일체>에서 차용한 말이다.

차가운 머리로 판단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며, 냉철한 눈으로 보고, 진실한 손으로 매만지고, 깊고 신중한 입으로 설명하고, 열린 귀는 차이를 수용할 것이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야 할 예술.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강령임을 강조한다.

최근 메스컴을 달군 미술계의 ‘관행’이 편치 않다. 그 관행의 모델인 개념미술가나 미니멀리스트, 팝아티스트들이 나의 강령을 들었으면 고루하다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과 ‘관행’을 주장하던 주인공과의 행보는 확연히 달랐다는 점이다. 유명인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작가와 대중이 받았을 상처와 오해의 잔흔은 남는다. 그 중심에 선 ‘관행’은 환불만이 답일까. 깊은 자각과 개선이 없는 한 이번 ‘관행’은 두고두고 불편한 ‘관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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