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만주 모던
<신간>만주 모던
  • 남승렬
  • 승인 2016.06.0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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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韓 성장 밑바탕엔 만주가 있다
만주철도
만주철도의 모습.

‘한강의 기적’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이다. 비결은 여러 가지가 논의되지만, 그 중 하나로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이 꼽힌다. 이 조급증과 근면성에 대한 뿌리를 한석정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1960년대 이후 압축 성장이 아니라 그 이전인 만주국(1932~1945년)에서 찾는다. 이 책에서 그는 불도저 체제의 연원을 고찰하며 한강의 기적이 식민주의, 특히 광복 전 만주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만주국은 어떤 곳이었을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만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관동군을 주둔시켰다. 관동군은 1931년 일본 정부 혹은 육군 본부의 명령 없이 군벌 장쉐량 체제에 전쟁을 도발하고 이듬해 만주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만주국이다. 만주국은 결국 일본 제국의 팽창과 붕괴를 초래해 메이지 국가의 자승자박적 조건이 됐다.

만주국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겪으며 전시와 준전시를 유지하고 사회적·경제적 자원을 총동원했다. 총력전이란 용어가 개화한 곳도 만주국이었다. 이것에 만주국에서 젊은 날 중요한 경력을 시작했던 박정희, 김일성 등 후일 남북한 라이벌 체제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남한 재건 체제에 중요한 지침이 된 것이다.

북한으로 인한 공간적 단절로 남한에서 만주는 잊힌 공간이 됐다. 광복 이후에도 한·중·일 3국 모두에서 만주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변방의 역사로 터부시됐다. 하지만 만주국 시대는 화려했다. 역사적으로 만주의 특이성은 ‘융합’이었다. 청을 건설한 만주족 외에 다우르족, 오로첸족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다. 만주국의 통치자들이 고안한 국가 이념도 ‘오족협화(五族協和)’, 즉 한족, 만주족, 몽골족, 일본인, 조선인 등 다섯 민족이 공존한다는 것. 만주는 극동 3국의 지식인 수백만 명이 모여 사는 동양의 신천지였다. 20세기 초 이광수 등 조선 선각자들의 행선지가 도쿄였다면 1930년대 지식인들은 만주를 향했다.

창춘 옛 중심가에 남아 있는 관공서 건축 양식은 동서 혼합 디자인이었다. ‘만주 웨스턴’ 같은 국제적 계보 영화가 만들어졌고, 조선과 일본에서는 만주에 관한 가요 수백 곡이 만들어졌다. ‘동양의 파리’ 하얼빈에는 수십 개 언어가 공존했고 외국인 16만명이 살던 다오리에는 바로크풍 건물이 섰고 중국 최초의 맥주, 백화점, 택시가 출현했다.

만주가 남긴 유산도 많다. 만주를 경영했던 기시 노부스케 등 만주 인맥은 전후 일본 사회를 이끌었다. 만주 개발에 기여한 ‘테크노 파시즘’은 전후 일본의 부흥과 함께 ‘테크노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졌다. 조선인에겐 기회의 땅이었다. 하급 관료 군인, 교사, 의사 같은 직군에 널리 퍼져 식민시대 노무직 외에 별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재일 조선인에 비해 다양한 취업과 사업 경험을 쌓고 근대성에 노출된 이들은 광복 후 각계에서 도약했다. 광복 당시 만주와 일본에 살았던 조선인은 약 400만명으로 전체 인구 중 약 5분의 1에 달했다. 유랑과 이산은 20세기 전반 조선인 삶의 양식이었다.

일찍이 근대화는 근면과 노동윤리의 확산과 닿아 있었다. 서구의 근대화는 일본을 통해 한국의 만주국에 전파됐다. 1930~1940년대 관동군에 의해 이뤄진 만주의 산업화와 도시계획은 한국에 고스란히 도입돼 건설과 동원, 경쟁 등 압축 성장에 맞는 경직성 근대화를 낳았다. 한국에서 개화한 만주 모던은 온 국토를 뚫고 메우는 직선적 건설, 속도에 매몰된 건설 시대가 도래하게 한 것이다.

남승렬기자 pdnamsy@idaegu.co.kr
만주 모던



한석정 지음/문학과지성사/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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