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라는 말의 가치
손수라는 말의 가치
  • 승인 2016.06.0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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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자연 요리연구가
작약 저물고 이어 밤꽃 냄새 비릿하다. 엉성한 담장에는 줄 장미 명랑하고 못자리 내놓은 논물 안에 앞산이 들어앉았다. 풋내 가득한 바람은 대나무밭을 지나 그럭저럭 집 마루까지 당도했다. 담장 넘어 부녀회장 집 마늘밭에는 머리채 뽑혀 나온 마늘이 밭고랑에 즐비하게 누워 구름 사이로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고 있다. 마늘 작황이 지난해만 못하다고 부녀회장님 근심이 살구나무 그늘만큼 깊어졌다. 더운 한낮은 동네가 기척 없이 적막하고 새벽녘에는 경운기 소리 요란한 유월이다.

오뉴월 하루 땡볕이 무섭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닷새를 도시에서 버티다 일주일 만에 시골에 올라가니 푸르던 보리밭이 그새 누렇게 물들었다. 유월 하루 볕이 얼마나 강렬한지 열매 맺는 가을 못지않다. 들판에 마구 쏟아지는 볕을 내다보니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기세다. 열렬한 볕에 호응이라도 하듯 앵두며 보리수 붉게 익어가고 오디며 매실은 이미 수확에 들어갔다. 자연이 짓는 농사에 사람은 거저 조금 힘을 보탰을 뿐인데 손수 이 많은 결실을 우리에게 선물하다니 유월이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올해 유월은 예전 같지 않게 덥다. 사람들이 얼마만의 더위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몇 년 만의 더위라는 말에는 관심도 없고 잘 익은 앵두며 오디가 그저 반가울 뿐이다. 오일장에 나가보니 식재료가 쏟아진다.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제철재료다.

이 재료를 다 갈무리해 두려면 그릇이 필요한데 여름 음식에 제격은 뭐니 뭐니 해도 대바구니다. 대나무를 얇게 찢어 발 곱게 바구니를 짜 놓으면 그 품격이 만만치 않다. 며칠 전 차 박람회에 나가보니 다구(茶具) 몸값이 대단하다. 장인의 손을 거친 귀한 작품이지만 서민이 일상에서 사용하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아 보인다. 차가 도(道)로서 예법을 다하려면 필요한 물건이겠지만 나는 차(茶)를 사랑하되 그 너머의 사치는 경계한다. 그저 편하고 쓰는 내내 내 몸과 합일을 이뤄 사람의 기운을 넘어서지 않는 물건이 나는 좋다. 예전 엄마가 보리쌀 삶아 처마 아래 매달아두던 그런 바구니가 없나 돌아봤지만 내 눈에 차고 넘치는 바구니는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못했으니 내가 매만져 쓸 수밖에. 일찍이 나는 ‘손수’라는 말을 사랑했다. 아무리 볼품없는 물건도 손수 했노라고 하면 금방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이 묘한 느낌을 뭐라고 표현하면 옳을까? 비뚤배뚤 서툴지라도 내 손으로 매만져 사용해보면 직접 만든 것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손끝으로 바구니에 마음을 싣고 정성과 신명을 다해보면 어떤 물질적 가치로도 셈할 수 없는 순도 높은 만족감을 얻게 된다.

놀며 쉬며 내가 만든 여러 물건은 집안 곳곳에서 제 역할을 다해내며 스스로 빛을 낸다. 명을 다하고 잊히는 물건과 용케도 눈에 띄어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물건이 우리 집에는 늘 반반이다.

덩굴손 그늘에 앉아 찹쌀 풀을 되게 쑨다. 망울 없이 보드랍게 풀어 여름 발로 사용하다 색이 낡아 넣어 놓은 삼베에 풀물을 찹찹하게 올린다. 삼베가 흠뻑 풀을 머금으면 오래 써 올이 풀린 대바구니에 붙인다. 면이 고르지 않으니 잘 붙지 않고 빈 곳에 바람이 들어 부풀어 오르지만 얇은 수저 뒷면으로 살살 문지르면 들뜬 삼베가 묵은 바구니에 가 착 달라붙는다. 잘 붙은 바구니를 그늘에서 천천히 말린다. 매만지며 말리다 보면 찹쌀풀이 딱딱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때 아주 부드러운 사포로 잘 밀어 면을 고르게 한 다음에 기와 가루나 고운 황토로 옷을 한 번 더 입힌 후에 색을 칠한다.

오래 손 때 묻은 느낌이 나는 색으로는 옻칠이 최고다. 여러 차례 겹쳐 바르고 말리고 다시 바르다 보면 깊은 색이 돋아난다. 옻 만지기가 부담스러우면 치자나 쑥물을 올려 그 위에 마감재로 마무리해도 볼만하다. 약간 거친 삼베 질감에 엄전한 자연색이 어우러지면 궁합 잘 맞는 오래 산 노부부 같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보면 그만 버릴까 생각했던 바구니도 명품으로 재탄생한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 되는 것이다. 어디 피가 통하는 것이 사람만이겠는가. 오래된 낡은 물건도 잘만 매만지면 슬슬 피가 돌고 생기가 돋는다. 묵은 물건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은 몰입의 기쁨과 쓰임의 실용성을 함께 충족시켜준다. 대수롭지 않은 것에 손맛을 들이면 그예 귀한 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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