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좁은기라”
“세상 좁은기라”
  • 승인 2016.07.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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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락
수필가
반월당 환승역이었다. 2호선 열차가 도착하자 승객은 파도처럼 와르르 타고 내린다. 너나없이 겨우 몸만 지탱할 정도, 빈 좌석이 있을 리 없다. 팔순이 넘은 한 어르신이 짐을 들고 불편한 몸으로 서성대고 있었다. 일반석도 군데군데 노인이 섞여 앉아있지만, 서서 계시는 분도 많이 띄었다. 이때 미리 앉아 있던 한 중년남이 선뜻 자리를 양보했다.

어르신은 무뚝뚝하게 앉았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다음 정거장이었다. 열차가 떠날 무렵, 자리를 양보한 그가 내리지 않자“주사, 여 안 내리능교”마치 잊고 있던 것을 알려주려는 듯 재촉했다. “전 조금 더 가야 합니다. 어르신 앉아 가십시오.”그제 마음이 놓이는 듯, 고맙다는 인사가 오가고 웃음 섞인 대화로 이어졌다.

자리를 양보한 오십 대 후반의 중년남이 종이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드시라고 권했다. 보송한 복숭아같이 표정도 무르익기 시작했다. 어르신은 한사코 사양하더니 자기 가방에서 붓 펜 두어 자루를 건넸다. 중년 남자는 직업이 교사인데 마침 필요하다며 잘 쓰겠다고 하자, 어르신은 장차 이 나라 일꾼인 학생들 가르치는데 수고 많다며 몇 자루 더 내어놓았다.

차 안이 다소 들뜨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엔 주위 사람이 경계하며 의문의 눈초리이던 것이 그 누구도 싫은 표정 없이 화기애애하게 바뀐 것이다. 에어컨 바람으로 실내는 시원했지만, 또 한쪽엔 다스한 정이 흘러 훈훈함이 감돌았다. 대부분 차에 오르면 으레 눈을 감거나 휴대폰에 집중하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문득 난 예전 한 시골 버스 간 광경이 떠올라 적이 흡족해하면서도 속으로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잠시 자신을 잊어갔다.

옆에 계신 한 어르신이 어느 학교 선생님이냐고 물었고 학교 이름을 대자 “아, 내 사위가 거기 근무한다.”고 한다. 그 참 신기하다며 죽이 척척 맞았다. “맞아, 세상은 이래 좁은 기라.” 할머니 한 분이 또 거들었다. 그 교사는 지금 행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인데 생각지도 않은 이런 분위기에 한껏 고무되어 보였다. 또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이젠 떡이며 과자 등을 내어놓았다. 급기야 어르신은 붓 펜이 내겐 필요 없다면서 필요한 사람에게나 주어야 한다며 가방을 다 털었고, 덕분에 그 주위에 앉은 분 모두 한 자루씩 나눠 갖게 되었다.

교사는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흡사 방송에 한 연속극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졌다. 주변 젊은이들도 부모님을 대하듯, 귀 기울이며 웃거나 즐기는 표정이었다. 사실 우린 지금까지 같이 차를 탔어도 경계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건이 떨어져도 참견조차 꺼리지 않았던가. 괜히 말붙이면 손해라는 식으로 대해 왔기에 이런 분위기엔 익숙하지 못했다. 젊은 연인은 못내 자기들이 일찍 자리를 비워주지 못했음을 미안하게 생각 하는듯한 눈치다.

내릴 때쯤, 어르신은 “미안쿠마, 내 올게 나가 팔십 서이요, 늙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죽진 않고…. 내 딱히 아픈 데는 없는데, 귀가 좀 먹어 말소리가 커 마이 시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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