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 라이프
쿨 라이프
  • 승인 2016.08.15 14: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병락
수필가
쿨 라이프! 아침에 일어나서 널 대하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더구나. 이 시간까지 멈춤 없이 돌아갔으면 열을 받아 혼수상태라도 되었을 텐데 끄떡없으니 참 대견하더구나. 밤에 자다가 몇 번인가 더위에 지쳐 뒤척이다가도 네가 깨어있는 걸 보며 믿고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몸통을 만져보았지만, 전혀 노하거나 격한 모습 없이 그냥 평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있네. 조금도 흔들림 없이 주인이 한 번 딱 지정해 놓은 대로 거역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믿음직스럽다.

집에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했던 업소에서는 한 달이 다 되어가도 소식이 없다. 연락해본 즉, 바빠서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잊을 걸 잊어야지 고객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돈 되는 것은 우선이고 별로 이익이 안 되는 없는 것은 뒷전이라는 얄팍한 상술이 밉다. 오늘도 수은주는 삼십도 중반을 오르내린다. 이 더위를 집사람과 둘이만 살고 있어 그런대로 넘기고 있다만 내일은 멀리 두 아들이 온다니 걱정이다. 어쩌겠나, 버티는 데로 버텨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엔 실망키지 않는 선풍기 두 대가 있다. 묵직한 한 대는 거실에 고정이고 가벼운 선풍기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는 애용품이다. 그런 사랑덕분에 선풍기의 소중함을 터득했는가도 모른다. 나를 따르는 선풍기는 소음도 없거니와 하얀 바탕에 잿빛으로 된 무늬가 퍽 안정감을 준다. 십 년이 다되어 가지만 사용하는 데 별로 지장이 없다. 여태 노동 적정시간을 넘었다고 탓하지 않고 잠을 잘 자도록 해 줌은 물론 또 식사하는데도 늘 곁에 와 있다. 더위와 싸우면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오늘 아침 솔솔 불어주는 그 바람을 쐬며 멸치볶음에 ‘후루룩’ 물김치를 마시는 맛은 별미였지.

지금은 책상에서 글 쓰는데 나직이 지켜주고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햇살이 창가로 내리쬐는데 가히 살인적이다. 측은지심으로 바라본다. 연일 찌는 더위에 네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문득 대단한 발명품이란 생각이 든다. 슬쩍 내 쪽으로 방향을 꺾어본다. ‘드르륵’ 신음을 낸다. 잘못 놓였을까, 제자리가 아니라는 항의일까. 심하게 ‘털털’대고 있다. 세상사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좋은 화음을 낼 수가 없듯 이 선풍기의 작동도 그만 엇박자가 되고 만 모양이다. 통증이 심한가 싶어 얼른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비로소 저쪽 능선에서 달려오는 상쾌한 바람으로 바뀐다.

그렇구나. 이 선풍기도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나름 연주를 하고 있다. 미풍과 약풍 강풍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주인과 호흡하며 멋진 협연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미풍으로 틀다가 오늘 더위엔 약풍으로 한 단계 올려 본다. 한결 바람이 세다. 이참에 회전으로도 작동해본다. 좌우 움직이면서 물건들을 간질여 놓는다. 신문지와 옷깃이 팔랑인다. 저쪽 잎사귀가 춤을 추고 감촉도 훨씬 부드럽다. 제법 유명 오케스트라의 합주를 듣는 기분이다.

고정이 주는 것이 안락이라면 회전은 골고루 평등을 나눈다. 선풍기가 좌우로 바람을 몰고 다니며 내는 소리가 경쾌하다. 제 순서를 기다리며 책갈피의 흔들림도 느긋하면서 흥겹다. 절반만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몸을 비틀어 그 이상으로 고루 바람을 날려주고 있다. 종이비행기가 하늘을 훨훨 날 듯 거침없이 방안을 가른다. 뒤쪽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는 공중을 나는 착각에 들게 한다. 다시 비행기가 돌아와 머리 위를 날고 있다. 나는 이 더위에 뭔가 시원한 소식을 안고 왔을까 싶어 내심 집중해 본다. 그런데 슬며시 측은해진다. 이러다가는 선풍기를 오늘 내내 틀게 되는데 고장이라도 나면 어찌할까 싶다. 모든 건 한계가 있고 힘들면 쉬어가는 게 당연할진대 너무 혹사하는 건 아닐까. 지금 세 시 반, 한더위다. 그래 다소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회전에서 고정으로 맞춘다.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주인 품으로 ‘사르르’ 안겨드는 것이 꼭 애완용 동물 같다. 고맙다. 이번엔 미풍으로 한 단계 내려준다. 잠잠해졌다. 비행기 소리도 멈췄고 바닷바람의 시원함도 줄어든다. 견딜만하다.

곧 열대야가 엄습하리라. 낮엔 어쩔 수 없다 해도 밤새도록 힘겨운 사투는 줄여줘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 머잖아 네 장엄한 역할도 멈추는 날이 오고 말겠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온이 뚝 떨어지는 어느 날, 한 거죽에 덮여 침침한 창고로 들어갈 테지. 지난여름 빛나던 공과를 뒤로하고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긴 휴식을 취해야 하리라. 그 전에 나는 기꺼이 ‘쿨 라이프’ 너의 먼지 낀 날개며 부품들을 정성스레 닦아 저 볕에 말리리라.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