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필수 전제조건, 기부문화
복지국가의 필수 전제조건, 기부문화
  • 승인 2016.09.0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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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
올해도 정부 추경예산 편성에서 복지예산은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서민이 체감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대규모 증세나 국채발행도 여의치 않은 현실이다. 저출산 고령화, 일자리 감소, 소득 양극화 등 당면한 과제는 복지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직결되지만 OECE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우리나라의 복지재정은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 험난함을 일깨워준다.

미국 최대의 모금단체인 세계공동모금회(United Way Worldwide)의 지난해 연간 총 모금액은 5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난해 연간 총 모금액 5,200억여원의 약 10배에 달하는 큰 규모다. 세계공동모금회의 고액기부자클럽 회원이기도 한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2010년부터 전 세계 수퍼리치들을 상대로 ‘기부 서약(Giving Pledge)’ 운동을 펼쳐왔는데, 지금까지 생전 혹은 사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전 세계 155명의 부호 가운데 80%(125명)가 ‘미국인’이라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필자는 수년 전 세계공동모금회에서 몇 달간 그 곳의 모금활동과 기부문화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세계 최고의 갑부와 일용직 막노동꾼이 모두 흔쾌히 기부에 참여하는 나라. 웬만큼 유명한 사람이라면 자기 이름의 자선재단을 하나쯤 설립하는 나라. 미국인들은 어떻게 기부와 봉사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미국의 발달된 기부문화의 근원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미국의 저력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프랑스의 정치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초창기 미국을 여행하고 1840년에 펴낸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그는 “인생의 어떤 단계에 있던, 모든 연령대의 미국인 그리고 모든 유형의 성향을 가진 미국인들이 끊임없이 조합을 구성했다. 병원, 감옥, 학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모습을 갖췄다.”고 적었다. 처음 유렵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온 신대륙에는 정부도 공권력도 없었다. 거친 환경과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자위대를 구성했고, 마을의 치안을 책임질 보안관을 뽑고 주민들이 한푼두푼 모아 월급을 줬다.

이처럼 건국 과정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거친 미국인들은 세금에 기반한 국가복지에 의존하기 보다는, 공영과 번영의 길이 무엇인지 모여서 토론하고 궁리하며, 복지와 교육문제와 사회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야할 책임으로 여기며 시민의 의무로서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실제 미국 성인의 90%가 금전적 기부에 참여하고 그 중 70%는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기부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식민통치와 6.25동란을 거치면서 폐허나 다름없던 우리나라는 특유의 교육열과 근면성으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했고 기부 규모 또한 최근 빠르게 커져가고 있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1998년 2조 9천억원이였던 우리나라의 총 기부금 규모는 2012년 11조 8천4백억원으로 4배가량 커졌다. 국내 최대의 모금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설립 초기인 1999년 213억원이던 연간 모금액이 지난해까지 24배나 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부금 규모의 증가만으로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성숙을 논하긴 이르다. 귀족계급이 사라진 미국에서 지도층은 기부와 봉사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만들어갔지만, 양반계급이 사라진 우리나라에선 집과 차의 크기로 사회적 지위를 삼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경제정책, 해방과 근대화로 주어진 평등주의에 기반한 질투와 경쟁은 한국경제 압축 성장 동력이 된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동시에 삶의 전 영역에 걸친 과도한 정부 개입은 국민들의 시민의식 성장을 지체시켰고 산업화 도시화 물결 속에 사회적 연대와 서로 보살피는 전통이 빠르게 사라졌다.

소외계층의 팍팍한 삶은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정부의 복지정책은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엔 태부족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참여와 기부문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유교문화가 강한 경북에선 익명 고액기부가 많은 편이다. 겸양의 의도와 더불어 기부에 대한 주변의 질시와 금전 요구를 염려해서 주저하는 것이다. 빌 게이츠 같은 미국의 부자들이 유명세를 얻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건 가진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 환원의 씀씀이와 지역사회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기부자가 존중받고 나눔을 생활화하는 기부문화의 정착을 소망한다. 시민의 기부와 봉사가 함께하지 않는 복지국가는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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