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이승만 동상은 현충원 묘소에 세워야
<대구논단>이승만 동상은 현충원 묘소에 세워야
  • 승인 2009.11.02 16: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대 열 (객원 大記者)

2009년 한글날을 기하여 세종로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섰다. 흔히 우스개로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호도 빵에 호도가 들어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리 이름은 세종로인데 동상은 엉뚱하게 이순신 장군뿐이었다. 충무공의 나라를 위한 공로야 필설로 표현하기도 어렵지만 세종대왕은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왕 중에서 가장 빛나는 공적을 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기에 일찍이 정부가 자리 잡고 있는 거리 이름을 세종로로 명명했던 것 아닌가. 그런데 천려일실이었을까. 동상 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나라를 지킨 대명사처럼 불리는 충무공의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늦었지만 세종대왕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은 우리 국민들의 존경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번에 건립된 동상은 5m가 훨씬 넘는 초대형 동상으로 인자한 인품을 잘 보여주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세종로에 이승만 동상을 건립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세인들의 빈축을 산 일이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 대통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종로에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 본란을 통하여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초대 대통령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가 4.19혁명으로 쫓겨나는 신세만 되지 않았어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불렸을 것은 불문가지다.

이승만이 재임하고 있을 때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국부(國父)’로 호칭했다. 그의 성격상 대통령은 과거 왕조시절의 임금과 동격이며 나라의 아버지로 자칭했을 법하다. 그것은 처음 정부수립을 하면서 헌법기초위원들이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초안을 잡아오자 그 자리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고치도록 지시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따라서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독선과 독재로 빠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오직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사사오입개헌이라는 전대미문의 독선을 자행하고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하여 영구집권의 길을 트는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독재정치를 강행한다. 이기붕의 후계구도를 완성시킬 목적으로 3.15부정선거를 단행하여 국민들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은 학생들을 선도자로 삼아 하야를 요구하게 된다.

4.19혁명이다. 이기붕일가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이승만은 오랫동안 머물렀던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가지만 곧장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비록 혁명이라고 하지만 주체세력인 학생들이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지 않고 야당인 민주당이 집권세력이 되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는 학생들이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궐기한 것이 아니고 부정부패에 대한 규탄운동이 커져서 혁명으로 승화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이 망명의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도 국민정서상 그를 반혁명세력의 대표자로 처벌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하와이로 떠났다가 몽매에도 그리던 조국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정경은 그가 자초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뒤 민주당정권은 5.16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군정에서는 `귀국’을 원하는 노인의 청원을 구태여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승만에 대해서는 애증이 엇갈린다. 그가 젊어서부터 조국의 앞날을 위하여 투옥과 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전개해온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일본치하에서도 수많은 동지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결사를 조직하며 임시정부의 요직을 맡아 항일투쟁의 선봉장이 되었던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당시 임시정부 내에서는 무력투쟁을 주 임무로 삼았지만 이승만은 `외교’를 중시했다.

그래서 임시정부 대통령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는 중국 상해 등에 살지 않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기를 즐겼다. 이봉창이나 윤봉길을 양성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김구 등과는 이러한 견해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는 광복군에 의한 본토상륙작전도 실행해보지 못하고 외세에 의한 독립국이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은 이승만은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으로 뽑히지만 거듭되는 실정으로 망명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앞서 본 바와 같다.

그의 재임 중 남산에 동상이 건립되었지만 4.19혁명의 날 동상은 끌려 내려와 거리에서 나뒹굴어야 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 동상을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수습하여 모시고 있다고 한다. 이래선 안 된다. 그의 동상을 남산에 복원하는 것은 4.19혁명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드려질 것이기 때문에 평지풍파만 일어난다. 그러기에 그가 누워있는 국립 현충원 묘소 앞에 모시는 것이 가장 원만한 방법이라고 본다. 묘소에 동상을 세우면 시비할 사람이 없다. 동상의 영원성도 보장된다. 역사의 평가는 냉혹하기에 우견(愚見)을 밝혀본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