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리에 대한 단상
해거리에 대한 단상
  • 승인 2016.10.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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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자유기고가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지금 나는 어느 계절을 겪고 있는가. 끝없는 자문자답을 하면서 갈볕에 취한 억새처럼 흔들리며 걸어본다.

생각이 곧 마음의 본질이라면 생각과 별개의 독립된 실체로서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아(眞我)에 이르는 길이라고 얘기하지만 나는 지금 가을 속에서 겨울의 삶을 살고 있는 듯 시리고 허기가 진다.

지난계절 분명 일분일초의 시간조차 아껴가며 살았는데 책상 위엔 끝내지 못한 일들이 빚더미처럼 쌓여 있다. 친구의 연락을 피해 다녔고 봄날의 많은 꽃들과 여름 바닷가의 푸른 파도 그리고 붉게 성숙한 단풍들까지 외면한 채 살았다.

‘먹고사니즘’에 허덕이느라 근본적인 삶의 문제라든가 시끌벅적한 세상의 일들은 물론, 나 자신조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현관에는 “너 자신을 알라” 는 경구가 새겨져있다고 한다. 가을은 분명 성찰의 계절인 듯싶다.

어느새 시월이다. ‘산목숨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등과 뱃가죽이 붙은 듯한 가난한 시절엔 하루해가 길기만 하더니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흘러가는 인생이 야속하다.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을 들어서자 노을이 붉은 치마폭을 펼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 냄새나는 치마폭을 벌려 맞아주던 엄마의 가슴처럼 포근하다. 시월의 노을을 받으며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를 읊는다.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집 앞에는 종일 목을 빼고 서서 나를 기다리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감나무는 상처 하나 없이 튼실한 열매를 가지가 부러질 만큼 주렁주렁 매달았었다. 푸른 감들이 허투루 떨어지는 것 하나 없이 홍시가 될 때까지, 끝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감나무의 모든 삶은 오로지 꽃과 열매를 맺는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어느 해가 되면 한 해 걸러 열매 맺기를 과감히 포기한다. 사람의 몸도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른 것처럼 감나무도 한 해 한 해 몸이 예전 같지 않은지 맺은 감도 허옇게 저승꽃이 피어 색깔마저도 선명하지 않다.

대나무를 두어 대 연결한 후, 한쪽 끝에 고깔모자처럼 붉은 양파 망을 씌운 긴 장대로 조심스레 홍시를 따던 언니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정성스레 약도 챙겨 먹이고 온 마음을 다해 감나무를 챙겼는데 당신 마음을 몰라준다며 속상해 한다.

병충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토양이 나빠진 것도 아닌데 감이 전해보다 훨씬 적게 달린 것이 뭔가 사람이 나무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된다는 뜻이다. 나무가 해거리를 하는 이유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다. 해거리 동안 모든 에너지 활동의 속도를 늦추면서 재충전에만 온힘을 쏟는다. 쉼 없이 열매를 맺느라 지치고 고단했던 뿌리와 가지들을 스스로 치료하고 이듬해 봄이 오면, 그 나무는 힘을 얻어 더없이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사람으로 따지면 그들은 해거리 동안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 동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이든 풍족하여 삶의 만족도가 무진장 늘어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보니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나 얻으면 하나 잃기도 하고 다 가진 것처럼 보여도 빈곳이 많다.

글이 안 되고 무기력한 날들이 늘어날수록 해거리를 하는 감나무처럼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해거리’는 복잡다단한 삶의 와중에 깊은 성찰과 넓은 안목의 뿌리를 다지고 울창한 감나무 잎처럼 넓어지는 상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

작가는 늘 바깥을, 너머를 꿈꾸고 말하는 존재라고 했다.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다보면 분명 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해거리’를 견디는 한 그루의 감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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