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때 아닌 친일논쟁의 수렁
<대구논단>때 아닌 친일논쟁의 수렁
  • 승인 2009.11.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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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객원 大記者)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어 때 아닌 친일행적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로 인하여 인명이 게재된 유가족 측에서는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법적인 소송으로 줄달음치고 있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친일인명사전이 계획된 것은 꽤 오래된 일로 기억된다. 이번처럼 3권으로 된 거창한 책은 아니지만 단행본으로 선뵌 일도 있다. 그 책이 너무 단조롭고 더 많은 친일분자를 수록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본격적인 사전발간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10년이 넘는 산고를 겪고 햇빛을 봤다.

아직 실물을 대하지 못하여 구체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지만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수많은 관계자들이 발분망식하고 뛰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친일의 기준을 뭣으로 삼느냐 하는데 애로가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다.

36년이라고 하지만 한일합방이 체결된 1910년 이전에 이미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빼앗겼다. 그 전에 이미 청일전쟁, 민비시해, 동학혁명 등 조선 내에서 전개된 회오리바람에 이 나라 정계는 물론 일반국민들까지 모두 일본과 얽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친일의 색깔을 구분해내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편찬위원에는 역사학자등의 참여가 필수적이어서 구색도 갖춘 것으로 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이 외부에서 모양새로 참여한 학자들은 발언권도 약하고 전업(專業)도 아니기에 형식적인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주관하는 사람들의 역사관과 사상관에 따라서 주도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의 기준은 일제시대의 `벼슬’을 위주로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의 관리를 했거나 사법 고등고시에 들어 판사나 검사를 한 사람은 친일분자가 된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여 높은 관직을 못했지만 독립 운동자를 잡아들이고 고문을 일삼던 헌병이나 경찰은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서는 친일기준이 흔들릴 수 있는 함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친일인명사전이 갖는 고귀한 의미를 생각하면 지엽말단이라고 치지도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의 부모나 조부모 등이 인명사전에 게재되는 치욕을 안아야 하는 유가족들의 입장에서는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번에 가장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 장지연과 박정희의 유가족과 지지자들은 가처분신청이 기각되자 본안소송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다고 들린다.

위암 장지연이 쓴 `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을사늑약을 비판하고 일제의 칼날에 신문사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처참한 심정을 조선인의 입장에서 피를 토하며 썼다. 이 글은 천하의 명문으로 문필을 벗 삼아 사는 사람들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언론탄압의 실상과 조국에 대한 애국단심이 잘 녹아있어 기자를 모집하는 신문사의 시험문제로도 단골출제다. 이 글을 쓴 장지연이 그 후 무슨 연유로 친일적인 글을 몇 군데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일야방성대곡 한편으로도 그가 우리 민족에게 두고두고 끼친 영향력과 업적이 더 크다. 해방 후 암살된 여운형도 건준을 만들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한 불굴의 투사지만 경성일보 등에 징병 권유문을 쓴 친일행적이 남아있다.

박정희는 누구나 알다시피 만주군 중위에 불과했다. 일본육사를 나와 왜 독립군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면 몰라도 친일의 경지에 올리기는 당시의 격에 맞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경제를 살려냈다는 최대의 칭송을 듣고 있지 않는가. 그를 친일분자로 몰아붙여 좋아할 사람들은 일본 밖에 없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은 북한은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척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잡았다는 얘기를 흔히 한다. 그러나 그들도 필요에 따라 친일분자를 중용했다. 만주에서 검사장을 지낸 한낙규는 검찰총장, 함흥철도국장 한희진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본군 조종사 출신인 이활은 공군사령관으로 발탁되었으며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통역이었으나 실세노릇을 했지 않은가.

물론 조국이 외적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여 나라를 빼앗긴 분통은 우리 국민 모두가 각심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외쳐도 모자랄 판인데 친일인명사전으로 우리의 치부를 들어내서 어쩌자는 말인가. 자칫하면 친일파 김성수가 세운 고려대가 친일대학이 될 수도 있고,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일본 국가(國歌)로 변모할 수도 있다. 조두남의 가곡 선구자는 말 달리며 친일을 외치는 노래가 될 수도 있다.

실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사전이 편찬되었다고 하지만 국가의 이익과 민족의 자존심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비록 수긍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보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해방직후라면 몰라도 대통령이 열일곱 번이나 바뀐 이 시점에서 안정추구에 몰입해도 모자랄 판에 중구난방의 국론분열을 유도한 이 사전은 공연(空然)히 평지풍파를 일으킨 평판을 면치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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