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독(愼獨)의 빈 터
신독(愼獨)의 빈 터
  • 승인 2017.03.0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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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는 것을 일컬어 신독(愼獨)이라고 한다. 지금 신독은 어느덧 ‘융통성이 없고 발전성이 떨어지는 태도’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도 좋을 만큼 그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 기회가 생기면 때로는 절차와 규정을 간소화해서라도 잡아야 할 것이며, 단속이 심하면 법을 지키는 시늉을 하다가 조금만 느슨해져도 위험한 기회(?)를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성공으로 갈 수 있는 왕도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지금 사람과 사물을 통틀어 가장 신독에 힘쓰는 유일무이한 존재는 CCTV다. 누가 몰래 쓰레기를 불법으로 투기하는 지는 물론이고 뺑소니 차량까지 적발하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놀라운 문명의 이기로서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사시사철 감시와 보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를 정작 필요에 의해서 개발한 ‘사람’은 어떨까. 스스로 만들어놓고 그 시선을 피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러니컬한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벌어지고 있다.

감시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백주대로에서도 과속은 물론이고 신호위반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 신독의 여지가 남아 있기나 할까. 신독(愼獨)의 출처이기도 한 대학(大學)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유력한 정설로 통하고 있다.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五經), 즉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예기(禮記),춘추(春秋)가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宋代)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四書)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게 되었다.

산천대로가 IT기술의 발전으로 손바닥만 한 모니터 하나로 어느 곳이든 길안내가 가능한 시대에 해묵은 유교적 사고를 논할 생각은 없다. 유교가 유능한 관리를 선출하고 양성하는 데 필요한 학문으로 우리나라로 유입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경로는 남아있는 사료가 없어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고, 그 후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억압을 받다가 조선시대로 접어들어서야 숭유(崇儒)정책으로 인한 유교가 활성화되었으나, 이로 인한 사대부들의 당파(黨派)의 이권다툼으로 마침내 허울뿐인 체면과 겉치레의 제례(祭禮)들만이 흉물처럼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걸 보면 정작 유학의 학문적인 가치나 철학적인 요소들은 증발해 버린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매번 대선을 통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는 국민들의 기대감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희망적인 요소를 배제한 대권주자들의 공약은 당선을 위해서라도 없을 것이며, 그 어떤 공약이건 공약 그대로만 지켜진다면 그야말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불온한 기대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경제나 정치사범들이 특사로 풀려나는 시점도 대부분 정권이 바뀌고 난 직후이다. 이전 정권에 빌붙어 부당한 이득을 취해왔던 핵심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이 청문회 등을 통해서 대거 구속되는 시점도 그 시점이다. 정권교체로 인한 권력의 이동이 이해관계자들의 이권과 맞물린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바뀌는 정권에 부당한 기대감을 버리고 옳고 그름의 정확한 가치관을 가지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신독이다.

지역을 대표하고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성찰(省察)과 자성(自省)이 사라진 채 폐허가 되어버린 정치의 터에 신독의 씨앗을 심어야 할 때다. 신독에 힘쓰지 않는 정치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정치 환경이 만들어져야한다. 죄를 짓고도 무슨 큰일을 해낸 양 당당하게 검찰청 앞에서 고개를 들고 기념촬영에 임하는 의례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는 기자들의 외침과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국민들에 대한 무심함과 냉정함의 표현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범법적인 행위가 드러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리는 만무하다. 그들을 둘러싼 이들이 모두 그들과 같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닮아가고 어느새 또 다른 ‘그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부터 신독(愼獨)에 힘써서 그들이 우리를 닮아가고 그들과 함께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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