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총리가 무릎 꿇을 일인가
<대구논단>총리가 무릎 꿇을 일인가
  • 승인 2009.11.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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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객원 大記者)

한나라의 국무총리는 흔히 국가원수의 다음 자리로 인식된다. 비록 대통령중심제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총리의 위상은 언제나 대통령을 대리한다. 우리나라는 정부수립 때부터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을 제정해놨지만 그 다음 자리에 국무총리를 두어 내각을 지휘하게 하는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다. 4.19혁명 직후 헌법을 고쳐 연래의 숙원이었던 내각책임제로 바꿨지만 이듬해 5.16쿠데타로 생명이 끊겼다.

강력한 권한을 한 손에 거머쥔 대통령 밑에서 총리를 한다는 것은 명색은 그럴듯하지만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과거 왕조시대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처럼 인식되어 있어 그 권세와 상관없이 총리의 위상은 굴뚝처럼 높기만 하다. 또 대통령에 따라 상당한 권한을 총리에게 위임하여 이른바 실세총리로서 행세한 이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특히 대외적인 관계에서는 국내에서보다 더 큰 위상으로 임할 수 있다. 외국을 방문했을 때 그 나라가 내각책임제 국가라면 당연히 실권자인 총리나 수상과 맞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총리는 그런 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대독총리에 머무를 수도 있는 처지다. 국회에 출석하면 대통령의 신년사를 대독하기도 한다. 지난번 국회에 출석하여 대통령 대신으로 신년사를 낭독하려는 총리를 야당의원들이 끌어내리려고 한 장면이 보도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또 난장판인가” 하면서 개탄한 일도 있다.

정운찬 총리는 왕년에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고 해서 과대 포장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무척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부지런히 민생현장을 살피기도 하고 사건 사고 현장방문도 빼놓지 않고 있어 참으로 분주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는 듯하다. 총리실에 들어가면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각종보고를 챙겨야 하고 국무조정실의 정보도 청취해야만 한다. 까다로운 민원도 살펴야 한다.

게다가 취임 당초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세종시를 원만히 풀어나가야 하는 작업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이미 자족도시로서의 기능을 살리고 행정도시는 꾸미지 않는 것으로 정리되었다고 하지만 후속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띵할 것이다. 한나라당 내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고 야당의 반대를 설득해야 하는 지난(至難)함이 어깨를 내리누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판에 하필이면 일본 관광객이 대부분인 실탄 사격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10여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화상을 입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엔고로 인해서 일본 관광객이 폭주하고 있다는 즐거운 비명을 올리던 여행업계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는 격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한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부산은 과거 일제 강점기부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고가는 연락선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부관 페리호가 왕래한다.

이 배를 타고 몰려오는 일본인들은 이 끔찍한 사고를 보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일본 언론들이 충격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에서도 뒤처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어 우리 정부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행안부 장관이 가고, 경찰청장이 직접 브리핑을 하는 것까지는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총리까지 나서야할 만큼 국가적 사고는 아니지 않는가.

이 사고가 테러에 기인했다거나, 군인이나 경찰 등 공직자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고라면 다르지만 단순한 화재사고라면 아무리 관광객의 희생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총리까지 동원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화재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총리가 날쌔게 조문의 뜻을 표한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일본인 유족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구역질이 난다.

사람이 죽었을 때 조문을 가면 사자(死者)에게는 최대의 공례(恭禮)를 갖추는 것이 예의다. 그렇지만 유족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말로 조의를 표하면 되는 것이지 마치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총리의 모습은 그가 자신의 위치를 깜빡 잊어버리고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평소의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이해되기는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총리는 어떤 자리, 어떤 일 앞에서도 `총리’로서의 긍지를 잊어선 안 된다.

더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을 수십만 학살하고 수탈해갔으면서도 단 한 차례라도 일본총리가 무릎 꿇고 진정으로 사과한 일이 있는가. 기껏 한다는 말이 일왕의 입으로 “통석의 염을 금치 못한다.”고 했다. 사과도 아니고 유감의 뜻도 못된다. 이번에 우리 총리가 무릎 꿇은 행위는 과공을 넘어선 민족의 수치다. 오바마가 일왕과 만나 90도로 절한 행위도 미국의 조야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친일인명사전이 나와 국론이 분분한 가운데 총리의 무릎 꿇기가 터져 나온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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