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목숨 구한 충신과 하늘도 감동시킨 효자의 고장
이순신 목숨 구한 충신과 하늘도 감동시킨 효자의 고장
  • 황인옥
  • 승인 2017.08.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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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순의 '역사·문화 숨결 따라'-<11> 예천군
약포 정탁, 역적 몰린 이순신 위해 선조에 상소문 올리며 적극 구명
직무에 있어선 강직한 면모 보여 문정황후 청 거절한 일화 유명
정탁 기리는 ‘도정서원’ 볼거리
용두리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효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도시복
여름에 홍시·겨울에 수박 구해 호랑이 등 짐승도 감동 효행 도와
명심보감 속편에 기록되기도
회룡포
예천은 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가 맞닿은 곳으로 인문학적 전통이 풍부하다. 예천군 용궁면에 위치한 회룡포 전경.


 현재의 삶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른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통해 현재에 비추어 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예천은 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가 맞닿은 곳으로 인문학적 전통이 풍부하다. 명망 있는 가문마다 효행의 미덕이 전해질 만큼 효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사제의 정이 돈독하고 고향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각별해 자긍심과 단결심이 유독 깊은 고장이다. 경상북도청의 이전으로 신도청 시대를 열어 가고 있는 예천의 역사 인물과 명소를 찾아보자.
도정서원
도정서원

◇우국충정(憂國衷情)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충신 약포(藥圃) 정탁(鄭琢)

나라가 혼란한 때는 유독 간신배가 득세하는 경우가 많다. 나라의 안위보다 개인의 욕심과 영달에만 눈이 멀어 자칫 나라를 큰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반면 그런 혼란기에 지혜로운 인물이 있어 어진 일에 앞장선 예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1526년(중종 21) 예천에서 태어난 정탁은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이 가득한 우국충정의 역사적 인물이다.

정탁은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예조 정랑, 사헌부 지평, 이조 참판, 예조·병조·형조 판서 등 나라의 중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좌의정의 벼슬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동안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기에서 건진 충신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들을 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충신들이 모함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 변론한 일이다. 여러 충신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으며,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 온 힘을 다해 죽음에서 구출한 일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약포정탁
약포정탁
정탁은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투옥되자 그를 구명하는 상소문에서 왜군과의 싸움에서 오직 이순신의 수군만이 연전연승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이순신 같은 인재는 참으로 얻기 어렵고 또 왜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순신인데 조정에서 이순신의 목을 벤다면 왜적들은 술잔을 들고 서로 축하할 것이라고 진언(進言)하였다. 또 이순신의 죽음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일이므로 옥사(獄事)를 통해 이미 법령의 엄중함을 보였으니 죽음만은 면하게 하여 다시 전공을 세워 속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진정(陳情)하였다. 정탁의 변론으로 이순신 장군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일로 인해 나라를 구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으니 인재를 알아본 안목이 없었다면 자칫 역사가 뒤바뀔 수도 있었으리라.

정탁은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에 집착하지 않고, 연원 있는 학문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 들이며 배운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능했고 정통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경세지용의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정탁은 조정에 있을 때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시종일관 온화한 인품을 지녔지만 직무에 있어서는 강직한 면모를 보였는데 그와 관련한 일화가 전해 온다.

정탁이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로 재직할 시절, 향실(香室)에서 당직하고 있을 때 불공으로 쓸 향을 보내라는 문정황후의 명을 받았다. 이때 정탁은 “이 향은 교사용(校祀用)이니 불공에 쓸 수 없다.”고 하며 보내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조정에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직무에 충실하고 강직했던 정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몸소 전장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만류할 정도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었던 솔선수범의 모습은 참된 정치인의 모범이 아닐까.

예천군 호명면에 정탁을 기리는 도정서원이 있다. 정탁은 도정서원 오른쪽 강 언덕에 있는 읍호정에서 만년에 머무르며 생애를 뒤돌아보고 삶을 정리했다고 한다. 이곳은 정탁이 지은 ‘우회(寓懷)’라는 시와 윤두수 등 여러 선비들의 시를 적은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예천군 도평리에는 정탁의 영정과 유고, 문서 등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약포유물관이 있다.



◇하늘이 내린 효자 도시복(都始復) 이야기

효성이 얼마나 지극하면 하늘이 내린 효자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예천 출신 조선 철종 때 인물 도시복은 성품이 훌륭하고 빼어난 데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의 화신(化身)으로 추앙받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1817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야목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75세의 생을 마칠 때까지 도시복이 남긴 효행(孝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지침서로 삼도록 하기 위해 <명심보감(明心寶鑑)> 속편에 기록될 정도로 부모에 대한 효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진했다. ‘솔개가 날라 준 고기’, ‘음력 5월에 호랑이 타고 얻어온 홍시’, ‘한겨울에 얻은 수박’,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배추밭을 타작하였더니 꽉 찬 배추가 가득한 이야기’, ‘호랑이와 함께 한 3년 시묘(侍墓)’, ‘하늘이 추려 낸 효행록(孝行錄)’, ‘꿩이 도효자의 품에 날아와 어머니의 병환을 쾌유하게 하였던 일’, ‘여름철 도효자의 논밭에만 우박 피해를 면하였던 일’ 등 도시복의 효행은 끝이 없다. 전해오는 효행 이야기 한 가지를 들어 보자.

음력(陰曆) 5월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음식은 먹지 못하고 때 아닌 홍시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효성이 남다른 도시복은 행여나 하고 감나무가 있는 곳마다 며칠을 돌아다니면서 홍시를 찾아 헤매었지만 홍시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도록 홍시를 찾아 감나무가 많은 마을까지 가서 숲을 헤매다가 헛탕을 치고 어둑어둑하여 집으로 힘없이 돌아오는데 집채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도망가려 하였으나 여러 번 앞길을 가로막으며 긴 꼬리로 제 등을 툭툭 치면서 타라는 시늉을 보냈다. 해치려는 뜻이 없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어 엉겁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말았다. 도효자를 태운 호랑이는 어둡고 험한 수백 리 산길을 나는 듯이 달리더니 드디어 산속 어느 집 뜰에 내려놓았다. 밤중이지만 염치 불구하고 주인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하였다. 주인이 쾌히 승낙하여 잠을 잤더니 얼마 안 되어 제삿밥을 차려오는데 음식상에 홍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인에게 어머니께 드릴 홍시를 구하고 있는 자신의 사정을 얘기하고 제 철이 아닌 홍시의 내력을 물었다.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홍시를 몹시 즐겼기에 아버지의 제사에 쓰려고 해마다 가을이면 홍시 200개씩 골라 토굴 속에 저장하였지만 해마다 이맘쯤이면 홍시가 대부분 상하고 씀직한 것은 일고 여덟 개 밖에 안 되더니 올해는 웬일인지 쉰 개나 상하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라면서 이 모두가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된 것이니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라면서 홍시 스무 개를 내주었다.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문밖에 나오니 호랑이가 아직도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지라 호랑이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새벽닭이 울고 있었다.

하늘이 낸 효자는 산짐승까지도 감화시켰고, 호랑이가 몇백 리나 되는 강릉의 김씨(金氏)집에 홍시가 있는 것까지 알고 등에 태워 데려갔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정말 감동 그 자체다. 도시복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1882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가 직접 내방 탐사하여 왕에게 계장(啓狀)을 올렸으나 어수선하던 조선조 말엽이라 정려(旌閭)를 윤허(允許)받지 못했다. 근세에 들어 1978년 향토 유림과 유지들이 도시복의 효성을 널리 기리기 위해 예천공설운동장 건너편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워 무언중에 효심을 가르치고 있다.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도시복의 생가를 중심으로 효공원을 조성해 고귀한 정신문화인 효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현재의 삶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른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통해 현재에 비추어 보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예천은 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가 맞닿은 곳으로 인문학적 전통이 풍부하다. 명망 있는 가문마다 효행의 미덕이 전해질 만큼 효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사제의 정이 돈독하고 고향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각별해 자긍심과 단결심이 유독 깊은 고장이다. 경상북도청의 이전으로 신도청 시대를 열어 가고 있는 예천의 역사 인물과 명소를 찾아보자.
△육지 속 섬마을 회룡포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도리마을이다. 예천군 용궁면에 위치한 ‘육지 속의 섬마을’로 불리는 회룡포는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인근에 위치한 비룡산은 숲속 등산로와 원산성, 봉수대 등 역사적 정취가 숨쉬는 자연공원으로 산책과 등산코스로 그만이다. 비룡산에는 통일신라 시대 운명 선사가 세운 천년고찰 장안사가 산중턱에 있다.

장안사 뒷산에 올라가면 팔각정 전망대가 있어 회룡포 마을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000년도에 방영되었던 KBS 인기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이 되기도 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간직한 삼강주막

예천군 풍양면에 있는 삼강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어 예로부터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장사하던 배들이 오르내렸던 곳이다.

문경새재를 가기 전,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주막 등 상거래가 번성하였다.

낙동강 1,300리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삼강주막 터에는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간직한 채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신기한 곤충의 세계 예천곤충생태원

예천군 효자면에 위치한 예천곤충생태원은 365일 사계절 살아 있는 곤충에 관한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에는 3차원 곤충영상물을 3D영상으로 볼 수 있고, 곤충의 진화와 다양성을 즐길 수 있다. 또한 곤충을 산업의 다양한 분야로 활용하는 곤충자원관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체험공간과 휴게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교육을 겸한 가족 단위 나들이로 안성맞춤이다. 그밖에도 온갖 동ㆍ식물들이 뛰어노는 대형 체험온실과 자연형 곤충정원이 얼음보다 시원한 계곡을 둘러싸고 데크형 상설학습장으로 이어져 있어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곤충과 함께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보는 시간을 가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용문사
용문사 야경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용문사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예천 출신 두운 선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 용문사는 대웅전(보물 제145호), 윤장대(보물 제684호), 용문사교지(보물 제729호), 1684년(강희 23) 명문이 있는 대장전목각불탱(보물 제989호) 등 6점의 보물을 간직한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경내는 보광명전, 대웅전, 응향각, 응진각, 명부전, 응진전, 회전문, 범종루 등이 있다.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15m 좌우 대칭으로 각 1기씩 놓여 있는 경전을 보관하는 일종의 경장으로, 전경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불교공예품이다. 자유기고가 ubr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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