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서
꽃밭에서
  • 승인 2017.08.2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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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자유기고가
홍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골 길가엔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그 중에서 흰 눈처럼 작은 꽃잎이 매달린 꽃을 좋아했다. 혼자 피어있지 않고 개나리처럼 무리지어 줄기를 따라 피어 있었다.줄기를 꺾어 흔들면 진짜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집에 갖고와 유리병에 꽂아 놓을라치면 금세 후드둑 떨어졌다. 오래두고 볼 순 없었다.그래서일까. 유독 안타깝게 애착이 가는 꽃이었다.

봄이면 진달래꽃이 산을 연지곤지처럼 치장했다. 여리여리한 분홍빛에 이끌려 산속을 뛰어도 다녔다. 새잎이 많이 나지 않은 나무들 틈사이에서 화사한 분홍빛은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요즘에는 자연보호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꺽으면 안 되지만, 그 때 시골에서는 동심으로 충분히 꺽을 수 있었다. 홍희는 진달래꽃 망울이 크고 탐스럽게 핀 것을 골라 꺽었다. 딱딱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는 매우 경쾌했다. 홍희가 잡을 수 있는 만큼 많은 꽃가지를 꺽어 가슴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올때는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냉이 캐러 간 논두렁에 달라붙은 제비꽃도 캐서 집에 갖고 왔다. 도랑옆에 핀 달맞이꽃도 이름을 안 후론 더 좋아했다. 학교에 핀 목련,장미,개나리,다알리아, 봉숭화 등. 들에 핀 토끼풀,복숭아,배,원추리,방울꽃,할미꽃 등. 꽃이란 꽃은 다 좋아했다.심지어 잡초가 자란 망초까지 좋아했다.

그랬던 홍희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적막강산인 집 마당에 꽃밭을 가꾸고 싶어했다. 담장모퉁이에 괭이로 흙을 파고 호미로 땅을 골랐다. 나뭇가지를 꺾어 반달형 울타리를 만들어 꽂았다. 그 전 해 학교에서 모아둔 씨앗들을 묻고 물을 주었다. 굵은 돌멩이를 골라내고 싹이 돋기를 기다리며 흐믓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꽃이 피기도 전에 꽃밭은 무언가로 뒤덮였다. 농사짓는데 필요한 연장으로 덮일 때도 있었고, 리어카로 덮일 때도 있었고, 비닐이나 비료포대기로 덮일 때도 있었다. 가을엔 어김없이 짚더미로 덮였다. 내 보기에 좋은 꽃밭보단 농사짓는데 필요한 것들이라 치우라고도 못했다. 덮힌 것들 사이로 싹이 자라나 뒤틀린 걸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것들이 더 자라 꽃이 피었는데 짚더미에 완전히 뒤덮일 때는 짚더미가 야속했다. 홍희는 방에서 혼자 속으로 울었다.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다.

장소를 잘못 골랐나 싶어 앞마당을 포기하고 뒤안으로 옮겼다. 커다란 돌들이 서걱서걱 거리는 땅을 골라 좀자란 꽃을 심었다.그러나 뒤안도 일년을 버티기엔 무리였다.

짚더미에 덮이고 나뭇단에 묻혔다.

그 다음에는 삽지껄옆 담벼락과 도랑사이에 둑처럼 생긴 땅에 심었다. 끈질기기도 했다.그러나 담벼락옆 땅은 거름이 전혀 없는 황무지 같았다. 꽃은 자라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그렇게 세번의 꽃밭가꾸기가 실패했다. 그 후론 포기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다른 집에 꽃밭이 있으면 참 부러워했다. 특히 정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집 꽃밭이 크고 꽃들이 많았다. 그 집 엄마가 키크고 예쁜 얼굴은 아니었는데 그 엄마를 볼 때마다 꽃처럼 얼굴이 예쁘고 환해보였다. 그집 딸래미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희의 꽃밭이 실패로 끝나고 홍희는 하루하루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 했다.

재잘거리던 학교에서의 홍희도 말이 없어지고 수업시간에 창밖의 하늘과 건물, 목련꽃들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어린 홍희에게 꽃밭은 무엇일까? 왜 그토록 꽃밭을 가꾸고 싶어했을까? 홍희에게 꽃밭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홍희에게 할머니는 엄마같은 존재였다. 어린 홍희는 엄마가 그닥 생각나진 않는다. 집에 가면 엄마는 밭이나 논에 일하러 가서 안 계시고, 할머니가 맞아 주셨다. 쭈글한 손과 얼굴이지만 환하고 따사로운 할머니의 마중이 홍희는 좋았다. 먼 길을 다녀온 자가 집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편안함 같은 휴식을 느꼈다. 할머니는 색다른 반찬이 없는 밥상의 보자기를 들추고 밥을 먹으라고 주고, 홍희가 먹는 것을 보고 있으면, 색다른 반찬이 없는데도 맛있었다.

홍희에게 할머니는 밥이다. 질리지 않는 한결같은 밥이다. 꽃밭에 앉아 있는 것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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