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산천서 죽음 불사한 충정을 마주하다
정겨운 산천서 죽음 불사한 충정을 마주하다
  • 황인옥
  • 승인 2017.08.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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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순의 '역사·문화 숨결 따라'-<12> 청도군
화랑정신·새마을정신의 발상지
빼어난 산세 어우러진 고장
소싸움·와인터널 등으로 관광명소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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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청도읍성1
예로부터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고장이라 불리는 청도는 많은 역사의 인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빼어난 산세와 물세를 자랑한다. 사진은 청도읍성 전경.

우리의 산천은 어디를 가도 정겹다. 고을고을 어딘가에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는 홍익 정신으로 무장한 인물이 있어 그들이 펼친 선한 기운이 숨어 있기 때문이리라. 예로부터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고장이라 불리는 청도는 많은 역사의 인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빼어난 산세와 물세를 자랑한다. 씨 없는 청도 반시와 청정 미나리는 입맛을 돋우고, 국내 최대 규모의 역동적인 소싸움 경기는 흥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화랑정신과 새마을정신의 발상지로 불리며 최고의 전원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는 청소의 역사 인물과 명소를 따라가 보자.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절개와 직필의 사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자계서원

잘못된 세상을 새롭게 바꾸려는 개혁은 적지 않은 역사적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조선 시대 집단 지성인 선비 계층 가운데는 일신의 부귀영화에 앞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개혁 의지를 불태운 역사적 인물이 많다. 개혁이라는 큰 역사적 흐름을 돌려보고자 노력했던 신진 세력은 기득권 세력에 부딪히게 마련이어서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 준다. 조선 500년 역사 동안 이들 간의 알력에서 일어난 첫 번째 당파 싸움이 바로 무오사화다. 무오사화는 재야 신진 선비들의 정치 세력 중 하나인 사림파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의 정쟁으로 크게 화를 입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에 선 인물로 김일손이 있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학문을 중시하는 가풍을 이어 받은 김일손은 사림파의 대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정통 영남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했다. 어릴 때부터 사림파의 정체성을 지닌 <소학>을 배우고 익혔으며, 16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17세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된 후로 평생 그의 영향을 받게 된다.

23세 되던 해 장원으로 생원시에, 차석으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같은 해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게 되고, 24살 때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진주목사와 진양수계를 조직하였다. 그 후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두루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490년 나이 27살 때부터는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사관 활동에 나섰는데 스승 김종직의 수양대군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인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게 당쟁의 희생양이 된 계기가 된다. 김일손은 사관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강직하고 정의로운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김일손의 행보는 나아가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교정하고 증보했으며,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김일손의 활동은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올바른 조처였으나 역사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김일손의 사관 활동은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던 것을 빌미삼아 훈구파의 정치 공작으로 인해 김일손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무오사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김일손은 꺾이지 않았던 직필(直筆) 정신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고 현실에 대한 개혁 정책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인사정책에 대해서는 효행과 염치가 뛰어난 자와 재질이 훌륭한 종실(宗室)의 등용, 천거제의 충실한 활용 등을 주장했고, 언관의 활동 보장과 지방관의 사관 발탁 등을 건의하여 언론권의 강화를 강조했다. 또 법전을 지방 관아에서 충분히 활용하고 사원전과 서원 노비의 혁파 등을 건의하였다. 국방대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문관을 뽑아 변방의 장수에 제수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방비할 것을 제시하고, 당시 왜인들의 소란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에도 왜구들의 소요가 계속 일어났고 1592년 임진왜란까지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선견지명을 보인 셈이다.

35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김일손이 남긴 업적은 적지 않다. 그의 삶은 지금까지 면면이 흐르는 영남 사림 학파의 성장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는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였고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 맞선 김일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자계서원이 있다. 무오사화로 화를 입은 후 서원 앞을 흐르는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한 데서 ‘자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문집인 <탁영집>을 남겼다.

◇용맹과 기지로 임진왜란 최초 승전보 울린 이운룡(李運雲) 장군과 금호서원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대표적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지만 그의 신임을 받고 동지가 되어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인물로 청도 출신 이운룡 장군이 있다. 이운룡 장군은 1562년 경북 청도군 상남면 온막동 명대마을에서 무관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학업과 무예에 열중해 1584년 22세 때 무과에 합격한 후 관직에 올라 3도 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이운룡은 임진왜란 당시 원균의 부하로 있으면서 원균이 대패하여 전선을 버리고 도망가려 했을 때 크게 항거하며 이순신 장군에게 지원을 요청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군연합군을 결성하는 선봉에 서 바다의 패권을 되찾은 장본인이다. 이운룡 장군은 해전에서 이룬 최초의 승전보인 옥포해전을 필두로 한산도대첩, 사천·진해·한산양·안골포·부산해 등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로로 1593년 웅천 현감이 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천거로 경상 좌수사에 승진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군을 통제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역사 속 난세의 영웅은 나라를 구하기도 바쁜데 늘 권모술수의 모함에 빠지곤 한다. 이운룡도 예외가 아니어서 1598년에는 포로에게서 왜장 풍신수길이 죽은 것을 알고 도망가는 적을 막으려고 후퇴했다가 도리어 모함을 입게 된다. 이때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모친상으로 진영을 비웠다가 탄핵을 받아 서생포에 갇혀 있기도 했다. 이운룡은 1607년 오랑캐들이 북쪽 변방에 침입하자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전직돼, 기병 별대를 창설하고 갑산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또 1609년에는 충청 수사로 제수됐다가 또 다시 탄핵을 받고 고향 청도로 내려왔으나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종기가 악화돼 49세로 별세할 때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용맹스러운 전장의 장수로서 본분을 다한 백전불퇴의 전사였다. 이순신 장군은 ‘자기를 대신할 사람은 이운룡’이라고까지 신임했으며, 한음 이덕형은 ‘남도(南道)의 주인공’이라고 칭찬하였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역사는 영웅호걸을 알아보는 법.

경북 청도군 이서면 흥선리에는 이운룡의 영정을 봉안하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금호서원이 있다. 경내에는 상덕문(尙德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외삼문(外三門) 안에 동재와 서재, 강단이 있고, 강단 뒤에는 내삼문(內三門)과 현충사(賢忠祠)가 있다.

운문사
운문사

△솔향기 가득한 청정 비구니 도량 운문사

청도 운문사는 560년 신라 진흥왕 때 신승이 창건하고 608년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국사가 중창한 이래,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했으며 현재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비구니 사찰로 유명하다. 운문사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 미륵전, 작압전, 금당, 강당, 관음전, 명부전, 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 앞 석등(보물 제193호), 동호(보물 제208호),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 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돼 있는 처진소나무는 한 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두어 소나무로 자라났다는 이야기와 어느 스님이 절에 잠깐 머물렀다가 시든 소나무 가지를 땅에 꽂아놓고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 냈다는 전설이 있다.



△과학적 설계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석빙고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에는 조선 숙종 때 축조된 것으로 빙실 바닥 길이 14.75미터, 폭 5미터 넓이의 우리나라에서 축조 연대도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 또한 최대인 석빙고가 있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창고다. 보물 제323호로 지정된 청도 석빙고는 바닥은 직사각형으로, 천장은 아치형 모양의 화강암으로 축조했였다. 석빙고 앞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비석의 앞면과 뒷면에 석빙고의 축조와 관련한 내용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어 석빙고의 축조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는지, 또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짜장면처럼 배달되는 이색 명소 코미디철가방극장 & 코미티타운

청도군 풍각면 성곡리 성곡댐 앞에는 음식배달통 철가방의 모양을 형상화한 이색 명소 코미디철가방극장이 있다. 개그맨 전유성 씨가 운영 중인 코미디 전용관으로 재미있는 공연이 열리고 있다. 코미디철가방극장은 평일에는 오후 2시에 공연이 있는데, 관람을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와인터널
와인터널


△꿈이 숙성되는 와인터널

청도의 또 다른 명물로 각광받고 있는 곳으로 화양읍 송금리에 와인터널이 있다. 이 터널은 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에 완공된 예전 남성현터널로 철길이 중단되어 사용하지 않던 것을 와인터널로 개축해 이색 체험장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터널 안의 상시 온도가 13~15도 내외를 유지하고 있어 여름에는 피서, 겨울에는 피한으로 제격이다. 특히 내부 온도가 와인이 발효, 숙성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잘 숙성된 와인을 즐길 수 있고, 다양한 체험거리도 마련돼 있어 남녀노소, 가족과 연인이 함께 추억 만들기에 딱 좋은 명소다. 자유기고가 ubr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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