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동학혁명에서 전봉준을 뺀 천도교
<대구논단>동학혁명에서 전봉준을 뺀 천도교
  • 승인 2009.12.1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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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객원 大記者)

천도교에서는 12월1일 현도(顯道)기념일 행사를 개최했다. 마침 필자의 사무실이 수운회관에 자리 잡고 있어 신도는 아니지만 대강당에서 행해지는 기념행사를 지켜볼 기회를 가졌다. 천도교는 수운 최제우가 창도(創道)한 종교다. 그가 1860년 처음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한울님을 섬기는 시천주(侍天主)의 진리를 만천하에 펴기 위해서’ 시작한 이 종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의 서학(西學)과 대비되었다.

서세동점의 세계적인 물결의 흐름에 대항하여 뭔가 민족의 신앙을 갈구했던 당시의 민중의식은 동학의 가르침에 너도나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주교를 탄압하던 당시의 조정에서는 구름같이 모여드는 동학의 기치를 두려워하여 최제우를 혹세무민,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으로 대구 감영에서 참형에 처한다. 선각자의 수난은 곧 민중의 수난으로 발전했으며 제2세 교주로 취임한 해월 최시형 역시 모진 탄압을 받는다.

최시형이 교조가 된 이후 동학은 급진적으로 세력을 키우게 된다. 수많은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형편이었지만 벼슬살이를 하는 상하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급급했다. 대원군에 의해서 복원되는 경복궁을 짓기 위해서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자 서슴없이 매관매직을 단행했다. 심지어 보직은 주지도 않고 명목상의 벼슬만 팔아먹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도(吏道)의 혼돈과 부패가 극에 달하자 지방관아의 벼슬아치들은 온갖 세금을 제 주머니 채우는데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대표적인 사례가 전라도 고부에서 벌어진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수세를 걷는다는 명목을 내걸어 이미 건립된 보(褓) 위에 또 하나의 보를 쌓은 다음 이중으로 수세를 걷어낸다. 당시의 토지제도는 대부분 지주들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어 소작을 하는 일반 백성들은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권세를 내세운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지주들의 수탈이 겹쳐 소작농들은 나이어린 딸을 쌀 한 가마니에 지주의 첩으로 팔아야 하는 기막힌 사연이 속출하였다. 때마침 고부에서 수세의 이중과세가 계속되자 동학 고부접주 전봉준의 아버지는 백성들의 대표로 고부군수 조병갑을 찾아가 이를 항의한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불문곡직 매 타작 뿐이었다. 이미 기강이 해이해진 관리들의 행패는 법과는 담을 쌓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등 나라를 경영하는 기본적인 규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골 원님들의 권위는 그 위에 존재했다. 삼권을 틀어쥔 형국이다. 난장(亂杖)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혹독한 고문이다. 매 위에 장사(壯士) 없다는 말처럼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정치범으로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본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른다. 전봉준의 아버지도 이 난장의 희생물이 된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전해주려고 갔다가 아무 죄도 없이 장살(杖殺)을 당하고 말았다. 고부민중은 들끓어 올랐다.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치를 떨고 있던 차에 자신들의 뜻을 전하려던 사람만 희생을 당했으니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때 동학접주 전봉준은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이미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가 참형을 당한 후여서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동학도들은 분기탱천하고 있다. 이미 김개남 등 각지의 동덕(同德)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전봉준을 주시했다. 예지력이 뛰어난 전봉준은 시기가 익었음을 직감하고 사발통문을 돌려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고부 황토현에서 동학혁명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다. 1894년 동학군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썩어빠진 조정을 뒤엎고 새로운 개벽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전봉준은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군을 이끌고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을 점령하여 명실상부한 혁명군으로 급부상한다. 이 때 해월 최시형은 북접(北接)에서도 궐기해달라는 빗발 같은 전봉준의 전갈을 받고 망설임 끝에 9월에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걸어 기포령(起包令)을 내린다. 그러나 때는 늦어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와해된다. 당시 전봉준의 기세는 전국을 휩쓸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내려 보내 전주화약의 굴욕으로 전봉준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전국의 관아에 동학 집강소를 둬 국정의 실질적인 집행자로 등장한 것이다. 한양에 있는 왕만 껍데기를 유지했지 지방관아는 동학천지로 변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혁명이 실패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을 남기지만 역사는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현도 104주년 기념사에서 동학혁명은 최시형 혼자만의 공로로 바꿈질하고 있다.

천도교의 교주는 수운과 해월로 이어지지만 동학혁명을 거론하면서 전봉준 이름 석자가 빠진다면 어느 누가 옳다고 보겠는가. 한울과 사람 그리고 물건까지도 공경하는 삼경(三敬)을 내세우면서 엄연한 역사를 뒤집는다면 누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를 실천하는 신앙이라고 따르겠는가. 천도교의 쇠운(衰運)이 스스로에서 발원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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