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이그니스
호모 사피엔스 이그니스
  • 승인 2017.11.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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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중부소방서장-도기열
도기열 (대구 중부소방서장)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기원으로 여겼다.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이 불, 공기, 물, 흙이라는 4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4원소설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렇듯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은 인류에게 단순한 물질 이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졌다.

불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호모 에렉투스 때부터이다. 이때의 인류는 낙뢰 등 자연발생적인 계기에서 불을 발견했다고 한다. 불은 라틴어로 ‘이그니스(ignis)‘라 하고 번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불의 발견 과정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불은 인류에게 따뜻함 이상을 선물해주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불의 발견과 적절한 사용이다. 인간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때부터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계에서 월등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은 공포의 시간이었던 밤을 밝히고 생식을 하던 인류에게 화식을 가능케 했다. 이것은 소화에 사용되던 에너지를 뇌를 사용하는 에너지로 전용시켜 뇌 용량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한다. 또한 불은 인간이 추위에 더 이상 떨지 않도록 했으며 포식자나 해충으로부터 지켜 주는 역할도 했다. 불을 사용함으로써 생물학적인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진화의 변곡점마다 불은 정촉매 역할을 해왔다. 불의 사용 이후 또 한 번 획기적인 문명 발달을 가져온 철기시대 또한 불이 있어야만 가능한 문명이었다. 철을 가공하기 위해 철을 녹이는 고로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했다.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생활양식과 노동 형태의 변화를 가져온 18세기 산업혁명에서도 불은 필요조건이었다. 산업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증기기관과 엔진의 메커니즘도 불이 꺼지지 않고 연소와 폭발을 유지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인류에 있어서 불은 축복이지만 재앙이 될 때도 있었다. 불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부정적 외부효과로 인류 문명과 문화를 불태워 버리고 인간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우리나라의 국보 1호 였던 숭례문이 타 버렸고 대구 중앙로 역사 화재처럼 수백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우리 인류는 불을 만들지 못해 화로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보존하는 등 불의 사용이 제한적이었던 시대를 지나, 불의 인위적 사용으로 기인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현대에까지 이르렀다. 반면에 부주의한 불의 사용으로 귀중한 생명이 위협받고 인류가 쌓아온 문화유산이 소실되는 위험에도 노출 되어있다. 이처럼 불의 사용에 의해 영향받는 우리는 불의 인류인 호모 이그니스(Homo ignis)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쌀쌀하고 건조한 11월은 겨울의 문턱이다. 화재예방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11월은 불조심 강조의 달이기도 하다. 동절기에 접어들면 불의 사용이 많아지고 화재건수도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음식도 그러하듯 불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다루어야 사람에게 이로움을 준다. 화재예방은 거창한 운동이나 캐치프레이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작은 실천은 집집마다 소화기와 단독 경보형 감지기를 갖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화재, 구조, 구급현장으로 향하는 소방차량에게 길을 터주는 작지만 중요한 실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화재예방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철저한 대비는 인류에게 축복이자 선물인 불을 사용하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이다. 앞으로의 인류는 불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 의무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 이그니스(Homo sapiens ignis)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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