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天災)의 교훈
천재(天災)의 교훈
  • 승인 2017.11.2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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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열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한다.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이만한 비유도 없다 싶겠지만, 덜 아픈 손가락도 있게 마련이다. 양육할 때는 첫째에게 엄하고 둘째에게 관대하던 부모님도 막상 재정적으로는 첫째에게 관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스러운 ‘장남 우선, 차남 차선’의 질서가 워낙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관습인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선시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제사를 모셔야 하니 당연히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어야 위엄이 선다는 단순한 사유가 전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첫째는 어릴 때부터 맏이로서의 부담을 안고 자라서 유년의 기억이 온통 엄하고 모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니, 많은 유산을 받아도 고마움을 모르고, 둘째는 똑같은 손가락에 대한 믿음이 유산의 분배에서 깨져 버리고 고인을 원망하게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다자녀의 부모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덕목은 열손가락 모두 아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구성원의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평등이 기반이 되어야 공정사회를 이룰 수 있다.

한편 지진은 그야말로 일본에서 자주 일어나던, 우리와는 무관한 재해라고 여겼다.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일본이 호전적인 국민성과 절대적인 야욕으로 인해 천벌을 받고 있다고 믿었다. 다소 무리한 억지일수는 있지만, 주변국들의 선혈(鮮血)들로 수혈 받은 욱일승천기가 모기의 충혈된 눈알처럼 보여 다소 거북하던 차에 타국의 지진 소식은 오히려 반가움이었다. 그랬던 지진이 최근 들어 경주를 비롯해서 국내에서 빈번하게 발생되고 보니, 그들의 이른 내진설계와 지진에 대한 위기의식이 부럽기 그지없음이 민망할 따름이다. 천재지변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과거 로마의 폼페이(Pompeii)의 화산폭발로 동굴 속에서 부둥켜안은 채 화석이 되어버린 남녀의 모습이다. 이들의 사랑은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하필이면 사랑의 순간이 마지막으로 남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남녀의 사랑에 못지않은 것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포항의 강진으로 인해 연기되어서 지난 11월 23일 치러졌다. 수능이 1993년에 처음으로 도입된 이래, 예정일이 변경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다.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정상회의, 2010년 G20 정상회의로 연기된 적은 있지만, 모두 9개월 전부터 수험생들에게 고지되어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이번처럼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으로 인해 단기간에 연기되어 치러진 것은 처음이었다.

수능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는 우리나라 입시 현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엄청난 혼란과 마찰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수험생과 학부모의 반응은 의외였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새삼스러운 본질을 깨달은 경우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수험생은 어차피 치러야 하는 시험이라면 어서 끝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지만, 학부모는 연기된 시험 당일인 23일에는 시험이 끝날때까지 고사장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보였다. 지진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녀의 성적이 아니라 안전에 대한 관심, 그것은 부모의 마음이었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가족의 마음이었다. 필자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도 없었지만, 생명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아이가 태어나던 1997년 11월 23일 아침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기쁨만은 아닌, 그렇다고 슬픔은 더욱 아닌 벅찬 그 감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리사랑은 그리 시작된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힘든 시험을 치르느라 수고한 수험생과 자녀를 위해 기도했던 수많은 학부모 여러분들에게 부족하지만, 필자의 시 한편으로나마 위로를 전한다.

그 해 늦가을에 내려 온 너의 심장이 여러 가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지/자판기에서 뽑아든 커피를 마시다가 혹시 그 사이에 네가 찾아올까봐 병실 옆 비상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고/약속 따위로 정해진 시간도 아니었는데 너와 몇 시에 만나기로 한 양 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수많은 산모들이 누워 있던 그 병실에서 유독 너만을 세상이 제대로 기다리고 있으리란 실없는 기대감과 힘들어하는 엄마의 지친 얼굴과 그리고/그 곁에서 딸의 고통을 함께하는 할머니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혹시 아비가 부족해서 이렇듯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하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들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어떠한 시간에도 속해있지 않고 어떠한 공간에도 머무르지 않은 것처럼//떨어지는 낙엽이 스스럼없이 대지에 내려앉듯 그렇게, 그렇게 넌 내 품에 안기고//기억하니 아들아 아비는 그제야 사람다운 눈물과 다른 모든 아이들의 순결함을 깨달았다고/조용히 네게 얘기하던 날 그날 아침을 혹시 기억하니 ‘내가 부르는 남들의 노래’, 월간문학(2010) ‘아들에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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