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독립 위해 바친 삶…우리가 기억해야 될 이들
조국의 독립 위해 바친 삶…우리가 기억해야 될 이들
  • 윤부섭
  • 승인 2017.12.26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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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도시 대구의 독립운동가들 <上>
올해 대구시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지역의 서상돈, 김광제 등 선각자들이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자주적인 국민주권운동을 펼친 곳이 대구다.

2017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대구지역 시민들은 과연 대구경북의 독립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말과 일본 제국주의를 거치는 시절 대구경북 지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지만 총독부 참의를 맡거나 부역을 한 친일파도 가장 많은 곳이다.

친일파들은 과거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반면 애국지사들은 후손들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세계기록물 등재에 맞춰 대구경북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이는 누가 있는지 짚어본다. 2편에서는 대구형무소(현 삼덕교회터)에서 옥고를 치렀던 독립투사는 어떤 분이 있었고 사라진 대구형무소 일대를 어떻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인지 알아본다.

<편집자 주>

이상룡
석주 이상룡


전재산 털어 온 가족과 함께 만주서 항일 투쟁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년 12월 28일~1932년 6월 15일)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독립운동을 한 이들은 고국을 떠나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한 투쟁가들이다.

식민지 하늘 아래 일본에 무릎 꿇으며 살 수 없다며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을 헐 값에 넘기고 춥고 배고픈 이국땅으로 건너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석주 이상룡은 안동의 유림 명문가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09년 신민회 간부들의 망명 투쟁 소식을 들은 이상룡은 안동의 집 임청각(보물 182호)과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온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됐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했다.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했다. 일명 이상희, 이계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생가인 임청각은 왕의 궁궐이 아닌 사대부 반가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 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달성공원에는 달성 서씨 유허비, 이상룡 구국비, 허위 순국비가 차례로 세워져 있다. 이상룡은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김동삼
일송 김동삼


독립투사 양성 온 힘…옥고 치르다 순국
일송 김동삼(金東三·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



만주 호랑이로 불렸던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원명은 김긍식(金肯植).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김후병 등과 젊은 일꾼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했다.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에서 이상룡·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했고 신흥강습소에서 교육에 힘썼다. 1926년에는 두 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 정인호 집에 투숙 중 동지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김동삼, 안희제, 남형우 등 경상도 인물이 중심이 돼 만든 대동청년단은 항일비밀단체중 가장 오래 지속된 조직이다. 1909년에 만들어져 30년이 지난 1943년에 알려졌지만 8.15 해방까지 정식 해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왔다.

김용환
여현 김용환


만주의 독립군에 자금 보내려 ‘파락호’ 행세
여현 김용환(金龍煥·1887~1946)

파락호(破落戶)란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말한다.

1887년 안동에서 태어난 김용환 선생은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으로 일제 강점기 안동의 노름판이라는 노름판은 죄다 돌면서 18만 평에 이르는 종갓집(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과 논, 밭을 노름으로 날렸다. 1908년 이강년 의병 부대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고초를 겪고 풀려난 뒤 도박꾼으로 전락했다. 외동딸이 시집갈 때 시댁에서 장롱을 사라고 준 돈 역시 아비가 도박으로 탕진해 딸이 친정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파락호로 변신한 것이었다.

전 재산을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려면 사라진 재산에 대한 의심을 피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름꾼이 적합해보였기 때문이다. 김용환 선생이 숨을 거둘 때 동료가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묻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고 대답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외동딸 김후웅은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을 대신해 건국 훈장을 수여 받았다.

서상일
동암 서상일


동암 서상일(徐相日·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동청년단 활동…달성공원에 조양회관 건립

서상일은 1913년 대구에서 박상진 등과 함께 광복단을 조직해 군자금 모집사업을 했으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했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 3월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해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됐다. 서상일은 대동청년단 활동을 했고 달성공원에 조양회관을 건립한 운동가로 유명하다. (조양회관은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뜻으로 1982년 개인에게 넘어가 헐릴 위기에 몰리자 언론과 시민들이 이전 복원 운동에 나섰고 당시 이상희 대구시장이 부지 매입비를 지원해 현재 위치 동구 효목동으로 그대로 옮겨지게 됐다.) 서상일은 1945년 광복 후 송진우·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립해 총무로 선임됐다.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발기해 최초의 개헌안을 제출했다. 1950년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1956년 진보당을 창당에 참가해 간부로 활동하고, 1960년 사회대중당을 창당해 대표총무위원에 취임했다.

칠곡매원마을1
이수목·이두석 부자의 애국혼이 깃든 칠곡 매원마을. 대구신문DB


이수목(1890~1948)·이두석(1902~1938) 부자 독립운동가
조선 국권 회복 자금 모집·구국 계몽운동 앞장

이수목은 1890년 칠곡군 왜관면 매원동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 조선 국권 회복을 위한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했다. 1915년 정월 대보름 시회(詩會)로 위장해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했다. 그 후 1932년부터 장남 이두석의 항일 활동을 도왔으며 1944년 8월 10일에 여운형·조동호 등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할 때 중앙의 재무 담당으로 자금조달 관리를 맡았다. 아들 이두석은 서울 중동중학교 재학 중인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연대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강제 퇴교당했다. 1932년 4월에 왜관에서 동향의 정행돈, 이창기, 박몽득 등과 청년동지회를 조직해 농촌계몽, 소비조합 운동 등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했다. 일본에 가서 동경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독서회 성진회 회원들과 구국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38년 2월에 경찰에 체포돼 한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3월 23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종현기자 oplm@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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