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화가 이영륭(2) 모순된 삶도 감싸고자 했던 40년 행보
[서영옥이 만난 작가] 화가 이영륭(2) 모순된 삶도 감싸고자 했던 40년 행보
  • 대구신문
  • 승인 2018.01.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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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통에 반대하고자
추상미술그룹 ‘앙그리’ 결성
“감각에 치우쳤다”는 비평에
색면추상·미니멀리즘 탐구
사회 분위기 흡수한 80년대
대표작 격인 ‘무위자연’ 발표
90년대 자유롭되 질서 갖춘
선·색 사용으로 ‘조화’ 도달
무념무상
이영륭 작 ‘無念無想’

당시 벽(壁)동인의 주요 멤버였던(1961년~64년) 이영륭 작가는 국전 낙선자들과 함께 ‘벽전(壁典)’을 열었다. 덕수궁 담벼락에 설치한 ‘벽전’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앙데팡당전에 비견된다. 대작(100호~400호)을 건 ‘벽전’은 기성미술의 침체와 미술정치에 불만을 품은 젊은 미술가들의 쿠테타였다. “이 쿠테타를 주동한 것은 ‘벽전’, ‘서클’, ‘60년 전’ 동인들이고 중심 멤버가 이영륭이다.” (정점식.매일신문.1965년) 이어서 작가는 1963년에 ‘앙그리(Angry Young Man)’를 결성한다. 대구지역 최초의 추상미술 그룹인 ‘앙그리’는 전통화단에 반하는 단체다. 이들이 실천한 앵포르멜 회화는 혼란한 시대의 표상이자 아카데미즘에 대한 도전 다름 아니다. 3년 만에 막을 내리지만 혁신적인 취지는 다음 행보의 발판이 된다.

대구지역화단에서 추상화는 전통서양화의 탈출구였다. 새로운 미적 대안이자 방법적 모색이기도 하다. 당연히 혼돈과 혼동도 피할 수 없었다. “지금 추상화에 대하여는 이구불문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무의식과 정의의 잡음이 없고 더러는 화가 자신들의 추상화에 대한 미비한 제작 수법에 기인한다. 다른 예술장르도 그렇지만 미술도 이 지방(대구)에서는 많은 혼선과 착각을 이루어 왔다.” (최광렬.추상미의 질서-이영륭 개인전에 부쳐.매일신문. 1967.11.1) 같은 지면에서 최광렬은 추상화의 새로운 지평을 더듬던 이영륭 작가의 작품을 쾌락적 유희에 도취되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김윤수는 이영륭의 작품이 감각적이라고 진단하며 작품이 겸비할 내용의 결여를 우려했다. “지나치게 감각을 추구하는 작품은 작품의 내용을 추방해버릴 위험이 없지 않고, 내용은 반드시 어떤 의미의 전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내용이 배제된 작품은 그만큼 작품의 세계를 제한하게 될 것이다” (추상화의 시각 조응-이영륭의 제 4회 개인 작품전을 보고.대구일보.1967.11.8)

이영륭의 회화는 1970년대에 이르러 평정을 찾는다. 이전의 혼란과 무질서가 수습된 것 같은 간명한 형(Shape)과 형태(Form), 명쾌한 색채가 자신감과 차별화를 획득한다. 그의 도전정신과 추진력을 확인시켜주는 단서는 이렇다.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1회전을 열었고 65년 3회 때부터 본격적인 추상화를 내놓아 그 당시로서는 전위의 왕좌에 있었다.” (날고 싶은 공간의 구축-시대적 고민과 희열의 노출 작업.매일신문.1967.12.1) 이영륭 작가의 작가로서의 출발과 성장에 영향을 준 사람은 철학을 전공한 누이 이선숙 여사라는 것도 같은 지면에 수록된 내용이다. [생(生)](1963)과 1965년 작인 [대위(代位)A.B.C], [작위(作爲)], [생성](1969)에서 [생성기(生成期)]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에서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묻어난다.
 

이영륭작-무위자연
이영륭 작 ‘무위자연’.

이영륭 작가의 1970년대 작품인 [천지(天地)](1974~75)와 [해조(諧調)](1978~81)는 색면추상과 미니멀리즘에 가깝다. 당시 작가는 세계적인 추세였던 두 미술양식을 탐구하며 새로운 조형문법에 순응한다. 1972년에 新潮미술협회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46년의 전통을 유지 지속해오고 있다. 1980년대 작품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두 시기가 서로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차갑고 따뜻한 색에 더하여 경직된 수직선과 부드럽게 해체된 곡선이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기준이다. 차가운 청색조 위에 마아블링을 연상시키는 거친 붓 터치가 1982~89년 작 인연(因緣))에서 두드러진다. 같은 제목을 단 80년대 후기 작품에서는 기하학적인 형과 밝고 따듯한 색감이 화면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아마도 격정과 안정으로 양분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형적으로 가시화 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념무상-2
이영륭 작 ‘無念無想’

탈(脫)(1990~98), [만다라](1990년), [업(業)](1993~98년) 등 불교적 윤회사상과 도교사상이 투영된 1990년대의 작업과 그 이후부터 진행된 근작들은 삶의 관조에 보다 깊게 다가간다. 한 화면에 보색이 공존하고 선묘는 자유분방하다. 선은 자유롭되 무질서하지 않다. 극단적인 원색의 대비조차 이질감 없이 서로 조화롭다. 푸른색의 층차가 음악적 리듬과 시적 운율을 자아낸다. 갈색조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걸림 없이 다가오는 푸른색의 총합은 자연의 섭리를 함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무념무상(無念無想)](1994~98)이나 [무위자연(無爲自然)](1995~2003)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비움이 용해된 작품은 이미 조형논리라는 속박에서 벗어난다. 이영륭 작가의 작품이 품고 있는 텍스트의 구심점은 서로 모순되더라도 일천한 삶마저 하나로 뭉치고 품어 안는 포용에 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푸른색처럼 모든 것이 분화되기 이전의 원시질서와 같은 자연스러운 느낌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테이블 위의 따끈한 아메리카노가 식어갈 즈음 이영륭 작가에게 넌지시 우문했다. “선생님! 시간을 40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셔요?” 선생은 지그시 눈을 감고 묵언했다. 평생을 몸담았던 교직과 작가 모두 아쉬움이 남는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현답을 아낀다. 다만 숱한 기억과 상념들이 눈빛으로 전해져 올 뿐. 분명한 것은 이영륭 작가는 시대의 보편적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뚜렷한 주관으로 동시대 지역미술에 기록될만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이다. 1963년 대구지역 최초의 추상미술 그룹인 ‘앙그리’ 결성과 1972년 新潮미술협회 창립 등. 그간의 여정에는 보람과 희열, 질곡과 우수도 포함 되어 있다. 예술이 시대의 거울이자 삶의 기록이라면 이영륭 작가에게 푸른색은 아마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선생님! 왜 푸른색이세요?”, “음, 그냥 푸른색이 좋다…” 이영륭 작가의 푸른색 그림은 이성적으로 풀기?어려운 것을 감각으로 느끼게 한다. 그냥 이유 없이 느껴지는 그림의 결실은 밖이 아닌 안에 더 높이 쌓여있을 것이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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