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서예가 육잠 해광 스님, 詩 한 구절·무심한 달빛 덕에 30여년 붓을 잡았소
[서영옥이 만난 작가] 서예가 육잠 해광 스님, 詩 한 구절·무심한 달빛 덕에 30여년 붓을 잡았소
  • 대구신문
  • 승인 2018.01.3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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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불경·고전 속 글귀 읽고
초서·예서 다양한 필체로 표현
매일 글씨 300자씩 쓰며 연습
‘생명불식’ 주제로 개인전 3회

들꽃 한 송이 등 그림도 선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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拙樸(졸박).

찬바람이 낡은 승복을 뚫을 듯 날을 세우던 날 성당 곁 찻집에서 인터뷰를 청했다. 이제 서예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는 그는 스님이다. 법명은 해광(海光), 작품에는 육잠(六岑), 설표(雪豹), 지게도인 등의 아호를 주로 쓴다. 따끈한 차로 언 몸을 녹이던 그에게 대뜸 질문했다. “꿈이 뭐예요?” “꿈이요? 없어요!” 질문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할 때쯤 엷은 미소로 대답을 돌려준다. “글씨 한 번 잘 써보는 것입니다.” 단서를 구하려는 질문자의 무안함을 헤아려 급히 생각해낸 대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불교적 교리에 입각하여 참선과 수행 중에 그린 다수의 선화(禪畵)와 불경을 쓴 서예작품을 보고나서 한 질문치고는 어리석다 싶다.

육잠의 선화는 간결하다. 처음 본 순간 쩡 하고 다가온 그 느낌을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비유하면 무리일까. 단박에 가슴으로 다가온 느낌 때문이다. 반농반선(半農半禪)의 틈틈히 이루어낸 유희와 농필(弄筆)의 선묵(禪墨)세계. 그의 그림은 크기가 작다. 순수하고 심심한데다 담백하고 꾸밈도 없다. 쉬우면서 알차고 깊다. 그림과 글씨 글이 모두 그렇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상기하게 된다. 기거하는 거처도 같은 느낌이다. 방과 마루 마당 부엌 밭 해우소(解憂所)까지 청결하고 소박하다. 인법당(人法堂)에 작은 돌부처를 앉힌 암자도 육잠이 손수 단출하게 지었다. 정갈하고 청빈한 시간을 사는 수행자의 거처엔 모든 것이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존재한다. 들꽃 한 송이 작은 돌멩이 하나 조차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존중받는 듯하다. 문명이 치장한 것도 없다. 단순 소박한 육잠의 삶은 검이불루(儉而不陋 -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그 자체다. 그가 수행의 도구로 삼은 서예 작품의 한 문장이기도 하다. 육잠에게 서예는 수행의 도구이다. 서예는 대부분 선시나 불경 또는 고전의 문장을 탐독하고 쓴 것이다. 하나 예를 들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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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仙起居法(신선기거법).

“산당정야좌무언 적적요요본자연 하사서풍동임야 일성한안누장천(山堂雲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何事西風東林野 一聲寒雁淚長天 - 산집에 고요히 앉았으니 적적하고 적적하여 자연 그대로 동쪽 숲에 서풍은 무슨 일로 불어 기러기 장천에 울며 가는가./ 2010년 제2회 개인전 도록 p.45)”이 글은 중국 송대(宋代)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의 시로 절에서 재를 지낼 때 염송하는 장엄염불의 일부이기도 하다. 육조혜능대사(六祖慧能大師 638~713)가 듣고 깨쳤다는 금강경 제10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중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마땅히 머무른 바 없는 그 마음)을 칭송한 것이다. 이 밖에도 육잠의 글씨는‘부귀어아부운(富貴於我浮雲 - 부귀는 나에겐 뜬 구름, 논어)’를 쓴 유려한 초서에서부터 간명한 예서까지 그 필법의 폭이 넓다. 문장을 먼저 이해하고 전통서예의 서법과 예를 지키며 숙성시킨 필법이다.

현재 그는 영양군 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기거한다. 골 깊은 산중에서 자연의 정취를 벗하고 글씨를 쓰며 그림도 그린다. 육잠이 세운 자기 원칙이다. 그는 또 보기 드문 자칭‘지게도인’이기도 하다. 지게 지는 일 만큼은 도인의 경지에 이른 그만의 자부심은 부지런함의 다른 표현이다. 이전에는 거창군 수도산 풍외암에서 전기 전화도 없이 반문명인으로서 20년간 호롱불을 켜고 묵향에 젖어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영양 산골 그의 산거(山居) 풍외암에는 전기가 들어온다. 이제 조심스럽게 문명권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58년생이다. 24세에 출가하여 본격적으로 필묵을 가까이 한 세월이 30년 째, 농후해진 필묵의 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세월이다. 그는 붓을 잡는 손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매일 연필이나 펜으로 300자 이상을 쓴다고 한다. 삶의 일부가 된 서예가 육잠에게는 수행의 방편이자 작품인 것이다. 그림과 글씨를 모두 스스로 터득한 변방 작가 육잠은 개인전을 세 번 열었다.

전시는 육잠이 세상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신념 다름 아니다. 2007년11월(대구 봉산문화회관)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0년 11월(인사동 화봉갤러리) 두 번째 개인전에 이어 2017년 5월 인사동 우림화랑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했다. 모두‘생명불식(生命不食)’이 주제다. 생명불식은‘살아있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명자의 끊임없는 생명의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육잠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자연에 몸을 두고 마음을 오롯이 자신에게 비추면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다. 들리지 않던 것도 듣게 된다. 내려놓고 비울 때 비로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이자 그것조차 벗어나려는 그대로의 삶 자체이다. 그의 그림은 수행과정을 통해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것이 폭발음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수행자에겐 심상풍경이자 현실경인 것이다.

길섶에 핀 풀 한 포기, 노송 위에 무심히 뜬 달, 어두워진 밤 산중 생명체들에게 쪽창으로 불빛을 나누어주던 절집, 텃밭 곡식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모두 그가 생명불식의 눈으로 주시한 것들이자 그에게 깨달음을 준 것들이다. 군불 지핀 아궁이의 그을음을 모아 소포 포장지에 나무꼬챙이에 침을 묻혀 그리거나, 연필이나 색연필 등 흔한 도구로 간명한 선묘를 얹어 탄생한 그림, 밥상보에 손수 수놓은 들꽃 한 송이의 흔적은 육잠의 불이관(不二觀)을 보여주는 예이다. 내용과 형식, 재료와 작품, 승과 속, 안과 밖, 예술과 삶의 경계가 무색한 육잠만의 작업방식이다. 장르의 경계가 무너진 현대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을 만큼 형식이 범람한다. 비대해진 크기만큼 부재한 내용은 내면의 공허함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작더라도 가장 자기다운 작품이 몇이나 될까.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자생 자득하는 변방 작가 육잠의 생명불식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작품은‘표현’이다. 표현은 내적인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표현은 감정에 주목한 18세기(낭만주의) 예술개념에 기인한다. 그들은 회화에 감정이 내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까지의 미술은 모방과 재현에 몰두하였다. 모방(또는 재현)이 대상에 집중한다면 표현은 창작자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작품에 스며들 감정을 억누를 수는 있어도 재거 할 수는 없다. 이때 작품은 내용(감정)과 형식(표현)의 총합이다. 내용과 형식이 균형 잡힐 때 작가는 그 작품에 마침표를 찍는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나 하나(一元論)로 모아지는 동양사상은 추상표현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sm)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무아(無我)의 경지는 예술의 범주 그 너머의 것일 것이다. 육잠의 선화(禪畵)에서 그것을 본다. 그의 작품은 삶의 태도를 주목하게 한다. 작고 낮고 소소한 것에 눈 맞추게 한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생각조차 멈춘 상태에서 빚는 것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 같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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