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화가 김찬주, 한 공간에 있는 아이와 코끼리…순수성의 다른 말, 공존
[서영옥이 만난 작가] 화가 김찬주, 한 공간에 있는 아이와 코끼리…순수성의 다른 말, 공존
  • 황인옥
  • 승인 2018.02.2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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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
명확한 형태와 음영으로 표현
도로 위 돼지·집 안 부엉이…
이질감 드는 장소에 동물 배치
다양한 생명체 간 공생 꿈 꿔
공존1
김찬주 작 ‘공존’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한번쯤 의문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작가 김찬주의 개인전 팜플렛 첫머리에 기록된 작업노트 일부분이다.(2016년 8회 개인전) 바로 작가의 예술적 발언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한다. 작가는 관람자가 어떤 의문을 갖길 원하는지, 추론의 단서를 작품 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아는 것만 보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작가 김찬주가 들려준 일화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일화는 이렇다. 관람객이 곁에 섰던 김찬주를 알아보지 못한 채 작가가 전시장에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고백하건대 김찬주는 40대 초반의 남성 화가이다. 관람객은 그가 젊은 여성작가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객의 기대에는 작가와 작품이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었다. 이 상관고리에는 앞서 언급한 김찬주의 바람에 관람자의 기대가 하나 더 보태어진다. 작가는 관람자가 ‘작품’을 통해 의문을 갖길 바랐으나 ‘작가 자신의 이미지’까지 궁금하게 한 셈이다. 바로 작품이 주는 밝고 경쾌한 느낌 때문인 것 같다.
 

김찬주-화가
김찬주
김찬주의 작품은 유화(oil painting)이다. 2007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 부르그 국립대학에서 최고위 과정을 졸업한 그의 작업은 균형 잡힌 구도를 유지한다. 명확한 형태나 음영법에 더한 고도의 테크닉은 신고전주의 화법에 가깝다. 합리주의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이성적인 표현이다. 적절한 비례법과 정교한 묘사력은 얼핏 보아도 탄탄하다. 섬세하게 표현된 하늘과 나무·숲·바다 등은 과장과 왜곡 없이 제 모습을 유지한다. 사람과 동물은 실내 또는 실외(자연)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낯익은 소재들의 결합이다.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생명체들은 약진하진 않지만 생동적이다. 밝은 톤의 색채조화는 감미로운 언어로 다가온다. 모두 김찬주의 내면에서 잉태된 것이다. 그것이 환영의 공간을 형성한다. 작가는 이 환영의 현실로 동화 같은 감성을 자극하고 질문을 던진다.

모든 그림은 허구의 산물(fiction)이다. 김찬주가 전개한 가상공간도 그렇다. 가공된 현실이다. 상상과 사실의 조합, 즉 현실경과 비현실경이 버무려져서 하나의 공간을 이룬 것이다. 이 낯선 풍경에 김찬주는 ‘공존(共存)’이라는 제목을 단다. 그는 “같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공존이란 개념은 거리를 통해 함께 함을 규정하기보다 한 공간에 있다는 것에 좀 더 무게를 둔다”고 하였다. 그의 가상공간을 채운 개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익숙한 것이 모여 낯선 풍경을 펼쳐놓았다. 그러나 루소(Henri Rousseau )의 구겨진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단지 비범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의 붓으로 재창조된 공존의 현장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를 밀어낸다. 현실과 상상 간의 조화를 꽤하며 이상향을 주시한 작가의 작업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그의 화면에서 화자는 어린이다. 어린이는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간직한 타자이면서도 작가 자신의 아바타인 듯하다. 베르메르(Vermeer Jan)가 그린 <화가의 아틀리에>나 지오토(Giotto di Bondone)의 그림<애도>에서처럼 김찬주의 그림에서도 아이는 뒷모습으로 일관된다. 지오토가 <애도>에서 인물의 뒷모습을 통해 사건의 감정을 고조시켰다면 김찬주의 그림 속 아이의 뒷모습은 지오토처럼 감정을 고조시키지는 않는다. 부동자세인 아이의 얼굴표정에 대한 가늠은 오롯이 관람자의 몫이다. 어린아이는 닫힌 문 앞에 서 있거나 벽에 걸린 그림을 응시한다. 간헐적으로 돌다리 위에 서서 숲을 바라보거나 붓을 잡고 양들의 몸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오리와 코끼리·기린·갈매기 등, 서식지나 생활방식이 다른 동물들과 나란히 서 있다가 의자 위의 고양이를 주시하기도 한다. 이때 화면 밖의 관람자는 어김없이 아이의 뒷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일련의 묘사를 정리하면 아이의 뒷모습은 작가의 내면을 주목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한다. 서로 다른 종(種)의 동물들과 나란히 선 아이는 생명체들 간의 화평한 공존 또는 공생과 상생의 대변체로 읽혀진다.

이러한 작업의 촉매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이다. 환경파괴에서부터 노약자나 동물학대와 성차별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모두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이다. 작가는 암담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 이면에 가려진 세상을 반어법으로 역설한다. 그것이 예술적 발언으로 드러난 것이다. 화면에서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우리의 시선은 창문 너머 푸른 하늘과 맞닿는다. 빛줄기 아래 홀로 선 희미한 얼룩말과도 마주친다. 하늘과 바다, 얼룩말이 서 있는 곳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암굴의 성모> 일면과 겹친다. 암굴 속 저 끄트머리에서 빛으로 열리는 이상향에 필적할 만하다. 예술작품은 현실의 소재를 가공한 것이기에 현실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작가 김찬주의 예술의지도 꿈과 이상을 지향한다. 따라서 그의 ‘공존’은 이상향의 다른 표현이라 할만하다.
 

공존-2
김찬주 작 ‘공존’

‘공존’시리즈에 영감을 준 동물은 김찬주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인간과 동일한 인격체로 여길 만큼 동물에게 경도된 것은 어릴 적부터이다. 동물애호가인 그는 종종 인간과 동물이 서로 존중받으며 공존하길 바랐다. 공존의 배경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다. 이러한 그의 염원은 동물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 전반으로 확장된다. 인간의 삶을 표상하는 주 모티브는 문이다. 일찍이 기베르티(Lorenzo Ghiberti)는 <천국의 문> 에서 종교적 회의를 통해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로댕(Auguste Rodin)은 <지옥의 문>을 통해 타락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김찬주 작가에게 문은 단절과 소통의 담지체이다. 두려움과 설렘의 상징체인 문이 닫히면 두렵고 열림은 설렘을 동반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김찬주의 예술의지는 동심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고운 색이 여린 감성을 건드리지만 감각적인 작품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체성이 고인 작가의 확고한 신념은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놓치고 있는 삶을 환기시킨다. 대중이 김찬주의 예술적 발언에 공감하는 이유일 것이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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