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에 쓰인 국적
피부에 쓰인 국적
  • 승인 2018.03.2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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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대구교육대 대학원 아동문학과 강사)


세계화 시대다. 우리나라에서 더운 나라의 사람들을 흔하게 본다. 그러면 우리는 친근감을 느껴 다가가 묻는다.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그러나 그런 질문을 받는 사람들은 차별당하는 기분이란다. ‘너는 나랑 완전 다른 사람이구나.’하는 뜻으로 들려 불쾌해진다고 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저들의 황색, 흑색 피부에 가난한 나라의 국적이 붙어있는 듯한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리도 황색인종인데 뭐 그럴까 싶다. 내가 프랑스의 에펠탑을 구경하러갔다가 프랑스인이 나에게 “어디에서 왔어요?” 물었을 때, 나는 자랑스럽게 “아엠 프롬 코리아!”라고 외쳐대었다. 되돌려 생각해본다. 그 프랑스인 역시 나를 ‘너는 나랑 완전 다른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있어 물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생각 속에 차별화보다 ‘나와 다름으로 관심 있다.’는 뜻이 들어있지도 않았을까? 늘 좋게만 해석하며 살려는 내 생각일 뿐일까?

문득, 어느 책에서 읽은 흑인 아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린이집에서 자기 피부만 새까맣다고 놀림 받던 아이가 사라졌다. 온종일 찾아다니다가 옥상 물탱크 속에 앉아 자기 피부의 검은 색을 벗겨내느라 피부 껍질을 벗기고 있던 아이를 발견한 이야기였다. 그 아이 피부에 쓰인 국적은 껍질을 벗겨내어 없애고 싶을 만큼 창피스러운 나라였던가? 황금만능 시대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병폐가 하느님과 부처님을 슬프게 하고 있다. 차별받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묻지 말고 “이름이 뭐예요?”부터 물어주기를 원한다. “나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아니라 요키라는 한 사람일 뿐이니까요.” 그가 한 말, 이름을 불러달라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그의 말은 김춘수 시의 ‘꽃’의 의미를 들이대는 이야기였다. 정말 그렇겠다. 우리가 외국을 활보하고 다닐 때 “어디에서 왔나요?” 보다 “이름이 뭐에요?” 물어주면 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겠다. 친근감이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좋은 편안한 안정제가 되기 때문에. 단체로 낯선 나라 공항에 내렸을 때도 “무슨 여행사”라는 글씨만 봐도 반갑고 ‘굿네이버스 봉사단 환영합니다’는 현수막만 봐도 존재성을 인정받는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보다 본국 사람들끼리만 서로 통하고 친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크로아티아에서 귀에 익은 모국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까무라치도록 놀라며 반가워했다. “아이구, 국내에서도 못 만나더니 여기까지 와서 만나네요.” 하며 한 동안 편안함에 젖어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를 스쳐지나가면서도 그녀가 불러준 내 이름의 정감은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드링크를 마신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름이 뭐냐고 통성명 인사도 나누기 전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뜻으로 ‘어디’에서 왔느냐부터 물어왔다. 그래서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하면 ‘아, 가난한 그 나라!’ 라는 선입견을 가져 만만하게 대할 수도 있었겠고, 아니면, 뭔가를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생길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다름을 물어봐도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면 조심할 일이다.

그리고 낯선 나라에 오면 외롭기 마련이다. 외롭기는 국내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부모가 없는 아이나 혼자 사는 독거노인도 외롭지만 핵가족 시대에는 옆에 그대가 있어도 외롭다. 그래서 한국 여자들은 집에 오빠를 두고도 남자 친구도 오빠, 남편도 오빠로 불러야 더 친근감이 들어 덜 외로운 가 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식당에 가서도 온통 친척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지야! 여기 불판 좀 갈아 주세요.”, “이모! 여기 앞 접시 좀 갖다 주세요.”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식당에 가도 외롭단다. 모두 친척끼리 장사하고 친척집에 먹으러 온 줄 알고.

생각해 볼 일이다. 외롭기 때문에 친근감을 불러오게 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풍습을….

이제, 외롭더라도 호칭은 바로 쓰고, 피부 보며 생각나는 국적 대신 눈빛 보며 생각하는 그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회 풍습으로 바로 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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