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거품이 남긴 기억의 형태…아트스페이스 펄 초대작가 남채은
비누거품이 남긴 기억의 형태…아트스페이스 펄 초대작가 남채은
  • 대구신문
  • 승인 2018.03.2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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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거나 추억으로 남는 기억

생겼다 사라지는 거품으로 표현

행복·불행 반복하는 일상 ‘승화’
남채은01
기억을 모티브로 추상회화를 선보이는 남채은의 초대전이 아트스페이스 펄에서 열리고 있다.


간지 좔좔 흐르는 싱그러운 장미 한 송이를 컵에다 꽂았다. 형태가 예쁜 새 비누도 곁에 놓았다. 장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들어갔고, 비누 또한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형태가 일그러져 갔다. 아름다움으로 넘실댔던 대상들이 시간의 경과와 쓰임의 반복에 따라 빛을 일어갔다. 그 과정을 카메라로 담은 작품이 남채은의 ‘고고한 인생’이다. 그녀가 슬픈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꽃이 시들어가고 비누의 형태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허무죠. 그러나 그 시기 나는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꽃이나 비누를 통해서라도 사라지는 존재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정물작업을 주로 하던 작업이 어느 날 갑자기 변했다. 보통은 전작들에 예고편이 끼어 있기 마련인데 남채은의 경우는 돌변이었다.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신상의 변화가 아니고서야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녀가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사랑하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졌어요. 한 번도 외할아버지의 부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더 힘이 들었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장미와 비누 작업을 시도했어요.”

1년을 허무에 매달렸다. 상처가 큰 만큼 몰입도도 높았다. 작업이 계속될수록 그녀의 마음에 미세한 변화가 시작됐다.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기 시작한 것. 죽자고 덤볐는데 살아보라는 다독임으로 화답했다. 슬픔에 잠식됐던 마음결에 윤기가 돋는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비누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관찰해 들어갔고, 예전에 보이지 않던 비눗방울이 새롭게 마음을 건드렸다.

“비누를 많이 문지를수록 거품에서 무지개 빛깔 같은 색이 보였어요. 즐거운 느낌이었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거품이 사그라들었는데 아련하게 다가왔어요. 그걸 보며 사라진다고 해서 허무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깨달았죠.”

비누거품을 추상평면으로 구현했다. 장미와 비누를 관찰하던 작업과 비교하면 이번에도 확연한 변화다. 설치에서 평면으로의 외적 변화도 두드러지지만 ‘아픈 기억도 소중하다’는 내적 깨달음도 선명한 변화다.

“비누거품을 자세히 보면서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을 발견하게 됐죠. 거품이 사라지는 장면에서는 아련함도 느꼈어요. 우리 곁을 떠났던 이들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죠.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에 아팠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기억으로 충만함을 느끼게 되죠.”

일순간 사라지는 비눗방울을 허무함의 상징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삶과 죽음, 고통과 행복은 삶의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단 한 번의 고통과 단 한 번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둘의 무수한 반복이 곧 인생이다. 그렇게 보면 행복도 고통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비눗방울이 허무에서 일상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나만 힘든 것 같아도 옆을 돌아보면 상황은 모두 비슷하죠. 행복과 불행이 반복되다 보면 일상이 되죠. 비눗방울 사이의 공간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것들도 그런 것이죠.”

기억이 작업의 소재다. 비누거품 작업이 계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한 기억을 모티브로 하는 작업은 계속된다고 했다. 그러나 기억의 빛깔은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라는 예견을 내놨다.

“과거지만 현재 상황에 따라 잘라 내거나 덧붙이게 되죠. 그러한 기억의 변화가 미래에까지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보면, 저의 기억 작업은 계속되겠지요?(웃음)” 공병훈과 함께 청년작가전으로 초대된 남채은의 전시는 아트스페이스 펄에서 4월 15일까지. 053-651-695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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