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문강 류재학, 혼재된 詩·書·畵·刻…전통서화의 현대적 변용
[서영옥이 만난 작가] 문강 류재학, 혼재된 詩·書·畵·刻…전통서화의 현대적 변용
  • 대구신문
  • 승인 2018.04.0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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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섬유·캘리그라피 결합
실용서예 넘어 응용서화 시도
그림·글씨·도구·정신성 일치
제자 추모작 ‘무여연작’ 5점
문학과 그림의 조합 인상적
2008-무여죽
류재학 작 ‘무여죽’

약 40년 전이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서실로 들어왔다. 아이는 중학교 2학년, 15세 소년이었다. 대구시내 중심가 한복판에 자리한 서실에는 수강생들로 붐볐다. 그 중에서 큰 눈에 서글서글한 낯빛을 한 까까머리 소년에게서는 선한 심성이 엿보였다. 미래를 예단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 재능을 겸비한 아이는 총명하고 부지런했으며 스승을 잘 따랐다. 진지하게 스승의 일거일동을 주목하던 아이는 계명대학교 동양화과 86학번으로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어 동대학원에서 수학한 그는 한국화의 정체성 탐구와 모색에 열성을 다하며 신진 작가로 성장하였다. 고개지(顧愷之)의 ‘천상묘득(遷想妙得)’은 작가인 그의 작업에서 화두와 같았던 천상(遷想)을 탐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천상(遷想)은 중국 육조시대 고개지의 회화이론인 ‘천상묘득’에서 차용한 것으로 생각을 옮겨 묘한 이치를 얻는다는 뜻이다. 줄곧 천상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진하던 그는 열정적인 탐구정신으로 지역 화단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어 국내는 물론 다양한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예술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중 돌연 유명을 달리한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 바로 2006년에 작고한 무여(無如) 손성완 작가에 대한 회고이다. 작고한 무여의 작업열정은 유작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고 제자를 그리는 스승은 작품으로 고인의 예술정신을 호흡한다.

문강(文岡)과 무여(無如)는 사제지간이다. 무여(無如)는 서예가 문강(文岡) 류재학이 故손성완 작가에게 지어준의 아호이다. 故손성완의 아호 무여(無如)는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에서 따온 것으로 불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故손성완의 덕성과 예술적 기량을 인정하는 스승의 큰 마음이 담긴 이름이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가 초파일날 유명을 달리한 데다 2년 후 스승이 마련한 유작전에 부쳐 추모전에 무여연작(無如連作)을 짓고 쓰고 그려 제자를 추모한 것은 정말 드문 일인 것 같다.

일련의 무여 작품 <무여매(無如梅)>, <무여난(無如蘭)>, <무여국(無如菊)>, <무여죽(無如竹)>, <무여송(無如松)>이 그것이다. 모두 사군자에 무여를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사군자는 매화(梅花) 난초(蘭草) 국화(菊花) 대나무(竹)로 덕(德)과 학식을 고루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되는 자연물이다.

사람이 수신(修身)하고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로 인도할 수 있게끔 고안한 미학적 방법은 비덕(菲德)이다. 비덕은 자연계의 사물에 인간을 비유한 유가미학의 심미론이다. 이는 사물의 고유한 속성에서 군자의 면모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한 속성을 통해 군자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사물의 속성이 군자의 덕성과 닮지 않았다면 그 사물은 심미대상이 될 수 없다. 이유는 회화의 재제로 삼은 대상은 군자를 반영하는 피사체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물은 의인화되고 자연물의 의미는 소멸해 버린다. 대상은 곧 의인화된 사물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때 감상자는 표현된 대상에서 아름다움이나 시각적 즐거움이 아닌 지조와 절개 등의 가치를 읽는다. 예술 효과는 다음에 나온다. 바로 <무여매(無如梅)>, <무여난(無如蘭)>, <무여국(無如菊)>, <무여죽(無如竹)>, <무여송(無如松)>은 스승인 문강이 제자 무여의 예술성을 사군자에 빗댄 가치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글 고문체로 짓고 쓴 문강의 <무여죽(無如竹)>, <무여매(無如梅)>의 화제를 쉽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속을 비우면서 마디가 있는 것은, 높이 올라서도 꺾어지지 말란 뜻이, 높고도 곧을라치면 너만한 이가 없구나. <무여죽(無如竹)>

삼동한풍(三冬寒風) 차운 눈을 속살로 안고서도, 붉은 볼 속눈섭은 오히려 싱그럽구나, 일지단심설중화(一支丹心雪中花)는 너뿐인가 하노라. <무여매(無如梅)>

대나무와 매화의 속성을 비유하여 제자에 대한 애정과 기질을 문학과 미술을 조합한 현대 문인화로 승화시키고 있다.
 

화선지에수묵담채-6047
류재학 작 ‘무여송’

무여의 스승인 문강 류재학은 시서화일체라고 하는 전통적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증명해 보여준 보기 드문 문인화가이다. 그러한 전통의 바탕 위에 서·화·각이 혼재된 문강의 작업은 종이를 기본으로 목재, 석재, 금속재, 토재 등 다양한 소재의 바탕 위에 쓰고, 그리고, 새기는 방식이다. 실용서예를 넘어 응용서화의 영역을 개척한 그는 전통서화를 일상생활에 적용시킨다. 이를테면 사인, 석각, 캘리그라피, 현판, 명패, 인장, 생활목기, 섬유, 감사장(패), 롤스크린, 스티커 등이 그렇다. 실용적 성격이 강한 영역, 즉 서양의 타이포그래피의 한계를 동양의 서예술로 복원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서예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추상성이 짙은 갑골문을 문자적 관점에서 회화적으로 환원시킨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일찍이 문강은 우리(한국)회화가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동양회화의 역사와 철학에서 강조되는 내용이 현실 작품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전통에 대한 인식이 불필요한 골동적 시각으로밖에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강이 우려하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통회화에서 가장 중시되어 왔던 서예에 대한 인식은 “형태감을 중시하는 서양화의 소묘에 그 자리를 빼앗긴 채 현대미술로서의 존폐의 갈림길에 있다”고도 지적한다. 그림과 글씨는 그 자체의 독자성은 있지만 사실 분리되어서는 서로 온전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그의 지론이다. 그는 그림과 글씨가 서(書)와 화(畵)라기보다 서화(書畵)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봄이 옳다고 한다. 특히 “그림과 글씨는 그것으로 표현하는 주체, 재료, 도구, 기법은 물론 정신성까지 일치되어 있는 것으로 여타 다른 미술 영역간의 관계와는 다른 상호적 불가분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스승은 제자가 그립지만 고인이 된 제자는 말이 없다. 스승 문강이 詩·書·畵·刻이 일체화된 예술세계의 맥을 이을 제자가 더욱 그리운 이유이다.
 


류재학
 

류재학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동 대학원 졸업·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영남대학교·경북대학교·원광대학교 외래교수 역임, 대구·서울·도쿄·오사카 등서 개인전 26회, 외 국내외 초대전 다수, 현 응용서화연구소(부두루) 소장.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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