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래
내 딸이래
  • 승인 2018.04.0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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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주부)


“홍희야! 토요일 오후에 시간 되나?”


언니가 아침 9시부터 카톡을 했다.

“무슨일인데?”

“응, 비안에 있는 엄마한테 가려고. 니도 같이 갈래? 니가 왜관까지 기차타고 오면, 내가 운전해서 같이 가면 되는데, 어떡할래?”

아이들일로 바쁘다고 핑계대기엔 언니가 엄마에게 애쓰고 있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홍희도 엄마의 딸인데 안 간다고 하면 엄마에겐 나쁜 딸, 언니에겐 서운한 동생이 될 것 같았다.

“응 알았어. 시간 맞춰서 언니한테 갈게.”

언니와 톡이 끝나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의 엄마의 기억은 별로 없다. 초등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보단 할머니가 맞아 주었다. 쭈글한 손과 얼굴이지만 환하고 따사로운 할머니의 마중이 좋았다. 할머니는 먼 길을 다녀온 자가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색다른 반찬이 없는 밥상의 보자기를 들추고 숟가락을 쥐어주면, 할머니의 눈빛에 이끌리듯 밥을 먹으면 꿀맛이었다. 배부르고 질리지 않는 한결같은 밥맛이었다.

엄마의 존재감은 잘 때 느꼈다. 아버지, 엄마 사이에 자면, 엄마는 다리를 곧게 뻗지 않고 대각선으로 뻗어 홍희의 다리와 부딛쳤다. 그럼 홍희는 숨이 멈춰지며 슬그머니 다리를 뺐다. 아무데나 옷을 흐트러지게 벗어놓고, 머리도 헝크러진 엄마가 뿜어내는 산적같은 숨소리가 싫었다. 더운 여름, 일하느라 땀을 비오듯 흘린 날, 사방이 막힌 수돗가에서 물을 끼얹고는 등 을 밀어달라며 널찍하고 시커먼 등을 수그리고 있으면 짜증이 확 밀려왔다. 혼자 하지, 왜 나를 시키노 싶은데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고, 속에서만 홧병처럼 열기가 차올랐다. 얼룩덜룩한 점같은 것이 있고 미끈거리는 등에 손을 대고 문지를 때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여장부인 엄마는 할머니한테는 순종적인 며느리였다. 이빨이 성한데 없는 할머니를 위해 애살스럽게 따로 쌀밥을 짓고, 배추속 나물을 무치고, 생선 한 토막 밥상에 올리는 것을 보면 엄마의 부드러운 속살을 보는 것 같았다.

학교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새로운 세상의 가운데에 선생님이 있었고, 새로운 집의 엄마였으면 했다. 뽀얗고 갸름하며 단정한 얼굴에 까맣고 윤기있는 긴 생머리의 여선생님. 아이들을 부를 때면 다정스런 말투와 부드러운 미소로 모나리자를 닮은 선생님. 맨 앞자리에 앉아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또박또박 글을 읽으려 애쓰면 늘 웃는 선생님이 좋았다. 밝은 빛이 가슴으로 쏴하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딱딱한 나무껍질의 느낌을 받는 엄마와 대조적이었다. 엄마의 모습은 늘 헝크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파마머리는 정말이지 낡은 수세미같았다.

언니는 외모가 엄마랑 닮았다. 얼굴이 크고 뼈대가 굵다. 약간 살이 쪄 통통했다. 엄마는 언니와 이야기를 할 때면 표정과 말투가 부드러웠다. 가끔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 때도 있긴 했다. 언니는 대구에서 직장을 다녔다. 언니가 올 때면 집에 활기가 생겼다. 언니는 가방에 맛있는 과자와 고기를 넣어올 때도 있고, 옷이나 양말 등을 사올 때도 있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처럼 언니는 중학교만 하고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는 두 남동생과 같이 살았다. 그런 언니에게 미안해서인지 엄마 아버지는 언니만 오면 귀한 손님 대하듯 했다. 홍희와 있을 때 짓는 무표정하고 굳어 있는 표정과는 다른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엄마는 홍희가 결혼을 한 후 전화를 자주 했다.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왜 자주 전화하냐는 홍희의 질문에 니가 결혼하니까 전화가 하고 싶네. 잘 살아라 했다. 홍희가 딸을 낳고 딸이 자라면서 서로 살갑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엄마는 “니 딸은 니를 어째 그래 좋아하노?”라고도 했다. 딸에겐 “너 엄마 아니래, 내 딸이래” 했다. 엄마는 홍희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엄마랑 통화할 때 자주 말한다.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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