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에 너울지다
허울에 너울지다
  • 승인 2018.04.2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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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적폐의 산실은 혈연, 학연, 지연에 있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나를 낳아준 부모와, 함께 자란 형제에 대한 특혜는 어지간한 용기와 심지가 없으면 외면하기 힘든 탓에 더욱 그러하다. 소위 ‘빽’이라고 하는 든든한 무엇인가는 턱없이 부족한 개인의 능력을 겉포장하기도 한다. 서글프지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정치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만연하다. 정 많은 민족이라 더욱 그러하다. 지나친 접대문화도 마찬가지다. 법조인들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흥에 겨운 우리들은 이러한 유혹들에 쉽게 빠져들어 정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기도 한다.

‘사돈의 팔촌’은 먼 친척의 상징적인 표현인데, 이들 중에서 유명 인사를 자신의 것인 양 과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OOO아세요? 제가 잘 아는 분인데…’라고 운을 떼면서 자신의 인맥을 과시한다. 이를 받아들이는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어쩌라고?’식의 냉담한 반응도 있지만, 의외로 관대한 이들도 많다. ‘아, 그러세요? 그 분을 잘 아세요?’라며 관심을 표현하면 신이 나서 점점 더 많은 인맥을 소환한다. 문제는 그런 인사들과의 관계형성의 배경이다. 우연찮게 술자리를 함께 했거나, 다른 이를 통해서 소개를 받는 사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상대가 공직에 있는 사람인 경우 생각지도 않은 ‘청탁’이라는 위험한 선물을 건네받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는 면에 거절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4월 혁명이 어느덧 58주년을 맞이했다. 4·19혁명의 원인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자유당 정권의 불법·부정 선거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었다. 도화선에 불을 지핀 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를 정권 비호세력인 반공청년단이 습격한 사건이었다. 4월 19일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당일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죽고, 1천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공식적인 집계가 그렇다. 비공식적으로 사상자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가 없다. 시위가 점점 거세지자 그해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을 발표했고, 허정의 과도 정부가 수립된 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동안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이승만 박사는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주변에서....’라는 식의 표현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를 독재자로 묘사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기록에 의한 그의 행적 외에는 그의 인품을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거대 조직의 폭정과 부정의 역사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비롯한 각료들은 주변인들에 대한 당부와 함께 청렴의 몸가짐에 책임을 다할 의무를 가진다. 그럴 자신 없으면 아예 그 자리를 탐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대표해서 의견을 수렴하자고 뽑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보다 더 근로하지 않고, 군림하는 것은 또 다른 혁명을 야기하는 동기가 된다.

요즘 ‘사이비 민주투사’들이 범람하고 있다. 민주화 열풍이 휘몰아치던 80년대 대학가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운동권을 비판하는 것도 모자라서 비하하는 논리를 펴는 학생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학생들과, 부정한 나라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대자보와 학보에 기록하며 시위를 하는데 앞장섰던 운동권의 학생들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당시 학생운동을 외면했던 이들이 자신의 누리소통망을 통해서 이미 고인이 된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과의 ‘관계성 정립’에 앞장서고 있다. 자신의 후배, 친구, 선배 운운하며 말이다. 겉으로는 그들을 추모하거나 의혹이 가득한 당시 상황들에 대한 표방이지만, 속내는 ‘나도 그들과 함께 투쟁한 바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점이 여기 저기 드러난다. 역겨운 일이다. 역사는 나라 뿐 아니라 한 개인의 기록들도 기억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반성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뢰를 구축하는 모습은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실체를 보여주는 행보를 보여 왔다. 물론 최근에 국정농단의 막장 정치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했고, Me too를 통한 유력인사들의 낙마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 또한 응징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발전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속이 없는 겉모습을 ‘허울’이라고 한다. 이제는 실체를 하나하나 밝히고 가려내야 할 시점이다. 진실의 파도는 서서히 밀려오지 않는다. 하늘 높이 솟구쳐서 가식과 허울의 모래톱을 한꺼번에 덮어버리며 너울지는 것이 정의의 파도니 각종 사이비 민주주의는 이를 두려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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