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선은 과학·예술의 총체…민족정신 담아 판옥선 재현”
“함선은 과학·예술의 총체…민족정신 담아 판옥선 재현”
  • 황인옥
  • 승인 2018.04.2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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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극세 공예가 정재춘씨

경북 합천서 8분의 1 크기 축소

이순신 장군 位 걸치고 만들어

제작 기간 2년…공정 80 완료

해군 복무시절부터 함선에 매료

모형 경연서 최고상 등 5회 수상

“판옥선, 역사 되새기는 계기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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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공예가 정재춘씨와 직접 만든 판옥선.


나즈막한 두 채의 가옥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시골집 마당에 들어서자 배 한 천이 위용을 드러냈다. 판옥선이었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으로 분한 최민식이 133척 일본 수군의 배를 상대로 맹위를 떨쳤던 그 배였다. 함선 재현으로 평생을 바친 함선 극세 공예가 정재춘의 작품이다.

8분의 1로 축소됐다고는 하지만 그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남해 언저리라면 쉬 수긍하겠지만 내륙 깊은 경남 고령에서 판옥선은 의외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함선 공예 이력은 이미 화려하다는 응수가 돌아왔다. “이번 판옥선이 열 번째 작품이에요.”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으로 분한 최민식이 선조에게 쓴 장계에서 수군(水軍)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했을 때 그 배가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핵심 전략자산이자 주력전함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1555년(명종10년)에 신형 전함으로 개발됐다.

판옥선은 거북선의 독특한 겉모습 때문에 위상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전체 조선 수준에서의 위상은 최고였다. 왜군의 전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했고, 조선의 거친 남해 해역에 최적화된 전선이었다. 승선인원은 130명 정도고, 조선말에는 200명 정도까지도 탑승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선박간의 충돌에 있어 절대 우위였다.

정재춘의 판옥선 공정은 80%까지 진행된 상태다. 1층과 2층 내부 공정은 마무리됐고, 배의 선수에 해당하는 이물과 후미에 해당하는 고물만 남겨두고 있다. 판옥선의 화력을 담당했던 대포까지 실물대로 축소 재현해 놓았다. 금방이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출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단호하게 환상을 깼다. “모형일 뿐 큰 파도가 치면 가라앉는다”고.

제작 기간이 2년 남짓 걸렸다. 판옥선의 고증을 담보할 자료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구했다. 그런 덕에 지금까지 국내에서 재현된 그 어떤 판옥선보다 실물에 가깝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뭐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위를 몸에 걸치고 배를 만들었어요. 제 스스로 조선의 최고 장수가 됐죠. 시대와 인물과 신병이 통해야 무아의 경지가 되고, 그 상태라야 완벽한 재현이 가능하니까요.”

정재춘에게 판옥선 재현은 워밍업에 불과하다. 그는 해군참모총장배 모형함선 경연대회에 5회 출전해 최고상을 비롯해 5회 모두 수상했다. 역작은 구 소련 주력항공모함 민스크호(2만7천t급). 제작 기간만 무려 12년이 걸렸다.

민스크호는 구 소련이 자체적으로 연구·개발해 지난 1978년 2월 니콜라예프 조선공장에서 탄생했다. 러시아의 자존심이 담긴 키예프급 중형 항공모함으로서 태평향 함대에서 활동했다. 소련 해체 후 연간 1억5천만 달러의 유지비를 댈 수 없어 1995년 장착된 무기가 제거된 상태에서 한국 기업 인 영유통에 팔렸다가 1998년 중국으로 팔려가 세계항모·군사 테마파크로 변신했다.

“우리나라 수입업체인 영유통에서 러시아에서 매물로 나온 민스크함을 구입했을때 민스크함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는데 거절당했죠. 민스크호가 계류한 지역이 해군군사지역이라 안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해군에 편지로 요청해 촬영허가를 받아냈죠. 실물과 똑같은 민스크호 재현은 노력의 결실이었죠.”

그가 재현한 민스크호에는 군함과 군함에 탑재된 항공기와 함포 등 각종 화력이 실물과 동일하게 축소, 재현됐다. 섬세하기로 세계 최고일 것이라고 자부했다.

“배의 난간까지 일일이 구멍을 뚫고 머리카락 굵기만한 나무를 끼워 넣어 만들었죠. 보이는 부분 뿐만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바닥, 함선의 구석진 곳까지 완벽하게 재현했죠. 배의 천장 배관까지 완벽하게 재현했죠.”

제작기간만 12년이 걸린 역작, 실물과 근접한 재현. 이만하면 고생이 끝날 줄 알았다. 누군가는 알아봐 주고, 소장자도 나설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기우라고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40여년 동안 만든 작품을 단 한 번도 팔아본 적이 없다.

“민스크호를 만들면 세상이 환호할 줄 알았어요. 최고의 함선 재현가로 칭송받고 소장자도 나설 줄 알았죠. 그러나 세상은 조용했어요.”

낙담하는 시간 중에도 무관심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의 생각이 미친 것이 ‘대중성’. 민스크호, 특히 그가 주력했던 함선은 대중과 괴리가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또 다시 나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판옥선 재현에 들어갔다. 대중적인 배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막연한 욕심도 버렸다. 세상이 반응하면 좋고, 반응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족하면 된다고 위로했다.

판옥선 재현은 함선 재현때보다 충만한 자신감으로 넘실댔다. 한국인으로서 판옥선이야말로 내면의 정서까지 오롯이 담아낼 자신이 있었던 것. “판옥선이야말로 대중과 소통할 요소가 높다고 생각했죠. 세계 해군 역사에서 최대 함선이었던 판옥선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열망도 있었죠.”

함선에 매료된 것은 해군 복무 때였다. 당시 함선을 접하면서 이만한 예술품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에게 함선은 당대 과학과 예술의 총체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함선 재현은 제대 후 시작됐다.

“오직 독학이었지만 어린시절부터 조각하는 것을 즐겼던 끼가 있어 두려움은 없었죠.”

스스로 마이너 예술가라고 했다. 조각을 전문으로 배우지 않았고, 그저 함선에 취해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생의 업(業)이 됐다. 가정도 팽겨치고 오직 함선 재현에만 몰입했다. 그가 돈벌이를 위해 일을 하는 경우는 함선 재현 경비 마련일 경우뿐이었고, 그때마다 목수일을 했다.

평생의 일이라고 설렁설렁 하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하면 밤낮이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작업에 몰입하는 그의 아우라는 차라리 ‘기괴’였다. 그만큼 미쳐 있었다는 것.

그가 “예술가의 경지보다 신기의 경지를 추구한다”고 했다. “때마다 도약해야 해요. 현재에 머물러서는 명작을 만들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고, 몰입해야 하죠.”

세상 곳곳에 예인들이 산다. 세상의 부침(浮沈)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고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가는 예술가들이 그들이다. 정재춘도 그 부류다. 춥고 배고팠지만 항공모형 제작에 평생을 걸었다. 세속적인 보람과 무관한 채 외롭게 싸워왔다.

그가 “세상의 기준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여는 창조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도 했다. 특히 판옥선이 역사를 돌아보고, 삶의 이치를 깨닫는 마중물이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했다.

“판옥선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제대로 된 미학과 정신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것이 곧 인간의 본질로 확장되면 제 의도가 충분히 전달된 것이겠죠. 저는 계속해서 쉼없이 세속과 관계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예술을 해 나갈 겁니다.”

돈은 되지 않았지만 함선 모형을 만들면서 행복했다. 이제는 그 행복을 세상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이번 작품이 조선 강국의 배인 판옥선이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도 내비쳤다.

“배를 만들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이번 판옥선이 어딘가에서 전시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 좋겠어요. 제가 느꼈던 행복을 그들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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