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마음을 읽다
들꽃의 마음을 읽다
  • 승인 2018.04.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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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수필가)


밤새 뒤척이던 봄바람이 거실 문을 두드린다. 순간 톡이 울린다.

“좋은 아침입니다. 8시 출발, 늦지 않게 오세요.”

서둘러 거실 문을 열었다. 결이 고운 사월의 햇살이 내려앉은 아침, 내 마음과 닮은 목련꽃이 하염없이 진 자리에 앉아있던 봄바람을 부른다. 찻물을 올렸다. 물 끓는 소리가 경쾌한 장조의 음으로 아침을 깨운다.

양산 통도사의 산내 부속 암자로 ‘꽃암자’라고도 불리는 서운암으로 ‘전국 문학인 꽃 축제’를 맞으러 간다. 도심을 벗어나자 초록이 한껏 짙어진 들판과, 개성 따라 피어난 꽃들이 연신 감탄사를 부른다. 차창 밖으로 민들레홀씨들이 따라 나선다.

버스는 청도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양산 통도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사찰 안까지 소나무 숲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나란히 비켜선 소나무에서 베어 나오는 향긋한 솔향과 더불어 구수한 흙냄새까지 달려 나와 우리를 반긴다. ‘들꽃축제’와 함께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절집마당에 들어서니 항아리들이 부푼 몸을 벗고 햇살 목욕 중이다. 음력 정월에 영축산 약수에 십여 가지 생약재를 넣어 숙성시킨다는 약 된장은 맛을 보지 않아도 장맛을 짐작 하고도 남을 것 같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동안거를 지난 장독들 사이에 피어난 할미꽃이 해탈한 듯 웃고 있다.

서운암에 피어난 야생화는 그 가지 수가 백 여 종에 이른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들꽃들의 당당함에 이끌려 무리를 빠져 나와 산에 올랐다.

돌탑들이 보인다. 채워도 끝이 없고 비워도 한이 없는 인간들의 위태한 욕망을 작은 돌 하나에 담아 올리고 또 올려놓았다. 아무리 돌탑을 쌓아 올린들 무엇 하랴.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돌탑을 끌어안고 있던 대숲이 몸을 비벼대며 빗소리처럼 운다.

더 깊어지기만 하는 산길을 오르자. 등처럼 휘어지고 모란처럼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치마 속에 몰래 감춰 두고 쌈짓돈을 내어 주시던 복주머니를 닮았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복주머니를 열어 ‘학용품 사 써라’ 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금낭화다. 꽃 속에 숨었던 황금빛 꽃가루가 하늘을 난다.

높은 산은 쉽게 낮아지지 않고 계곡이 깊으면 물도 깊어지듯 황매화가 흐드러진 꽃길에서 바라본 영축산, 햇살은 맑고 공기는 청명하다.

카메라에 추억을 담으며 내려오는 들꽃과의 동행, 비로소 고단한 삶이 유순해 진다.

그늘에 약함을 알고 외로움이 싫어 볕으로 몰려가 무더기로 피는 꽃들이 왠지 사람을 닮았다. 하얀 꽃가루가 내린 듯 은은한 향을 풍기는 조팝나무가 환하게 웃는다. 소이부답(笑而不答), “왜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

내려온 산길 끝에서 보리수나무를 만났다. 학창시절 즐겨 부르던 ‘보리수’가 가지마다 연노랑 꽃을 매달고 있다.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으려 하자 지나가던 사진작가가 슬쩍 한 마디 하고 간다.

“보리수는 아침에 향기가 나지요. 꽃마다 향기를 품어내는 시간이 모두 다르죠.”

인연 따라 와서 인연 따라 가는 삶, 길섶에 피어난 들꽃도 때를 맞춰 피고 지며 때를 다하면 돌아가는데 내 삶의 때는 알고 있는지 자문자답 해 본다.

모든 꽃들이 한 순간에 일제히 피어나지 않듯, 하루 만에 완성되는 삶은 또한 없을 것이다. 세월 따라 무심히 피고 지지만 늘 처음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처럼 오늘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날마다 초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사월의 서운암을 내려온다.

하루의 해가 푸른 산빛으로 물들어 간다. 영축산이 슬그머니 감싸 안는다. 어제의 꿈들이 별이 되어 피어오를 것이다. 들꽃에게서 내 맘을 보고 온 하루, 꽃 피는 봄 사월에 읽는 편지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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