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화된 1950년대 화단에 뿌린 모더니즘 씨앗
관료화된 1950년대 화단에 뿌린 모더니즘 씨앗
  • 황인옥
  • 승인 2018.05.0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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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1917~2009)
20대 지역 화가 가르침 받았으나
전통 방식 대신 자신만의 길 개척
자기부정·혁신·노력 예술관 꼽아
리얼리즘 반대 ‘모던아트협회’ 발족
1957년 서울 현대작가 초대전 참여
지역 작가임에도 독보적 인물 부상
극재정점식의초기작-1937년
극재 정점식의 초기 작 1937년.


책갈피 속에서 꺼낸 고백이었다. “나를 문체의 사상가란다”극재(克哉) 정점식(이하 극재)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극재의 삶은 대체로 진지했다. 일면 자기 자랑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2002년 극재의 네 번째 수필집 <화가의 수적>이 세상에 나온 해였다. 책을 필자에게 건네며 덧붙인‘문체의 사상가’를 극재는 매우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흔치 않던 인간적인 면모에 선생 앞에서 그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극재의 말과 글, 그림에 응축된 사유는 한결같다. 문체나 글의 결과 깊이는 극재의 조형어법과 비례한다.‘문체의 사상가’는 독자가 바로 이런 것을 주지하고 한 말이지 싶다. 어쩌면‘문체의 사상가’야말로 극재를 이해하는 단서이자 핵심요소가 아닐까 한다.

극재의 화가로서의 출발점은 유년기로 상정된다. 일찍이 극재의 예술적 소질과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고모부였다. 고모부는 화업의 출발에 힘이 되어준 최초의 스승이다. 극재의 흔적이 담긴 자료에는 그림은 물론 육성이 있다. 또 육필로 기록한 강의 노트나 수필집과 편지글 등이 있다. 특히 서적은 그중 극재의 삶을 이해하는 상세한 단서로 용이하다. 아래 글에서 극재는 고모부와의 인연을 또렷하게 되새겼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6,7세 때 대구 남성로 약전 골목에서 한의사를 하시던 고모부로부터 한문과 글씨를 배운 데서부터 시작된다. 고모부는 이 무렵 내가 쓴 글씨나 그림을 이웃 의원이나 선비들을 만날 때 마다 화재로 삼았으며 여기에 힘을 얻은 나는 겁 없이 흥을 돋구면서 나름대로의 동작을 새겨나갔다. 그 후 철이 들면서 이 자세가 수련상의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일부러 그것을 고치려하지는 않았다. 이 버릇은 고모부의 그릇된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어린 것의 방자한 치기를 신기하게 본 나머지 그것을 재롱으로 봐 넘겼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주관적인 버릇은 학교교육을 받으면서도 따라다녔고 교사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정점식,「화가의 수적」(자서적 단상-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 아트북스 2002년, p221~222.)

극재 정점식 작 1977년
극재 정점식 작 1977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극재는 멈추지 않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자세야말로 극재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이룩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것이 예술가의 기본자세이자 예술의 생명임을 아는 극재였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극재는 지식을 습득하고 견문을 넓혀 주관적인 예술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데 주력한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찾아가려는 노력은 1930년대 말의 일을 회고한 그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당시 극재의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1937~38년경 나는 대구 조양화관에 있는 김용조(金龍祚) 화실에 드나들면서 이인성(李仁星) 서진달(徐鎭達)과 같은 선배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존경해왔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고 나름대로 철이 들면서 그들로부터 멀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의 전통적인 체질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정점식, 「화가의 수적」(자서적 단상-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 아트북스 2002년, p222.)

예술의 다음 단계를 이끌어내 준 것은 부단한 자기부정과 혁신, 그리고 예술창작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는 그의 저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극재의 수필집 <화가의 수적> 표지에는 다소 긴 글이 새겨져 있다. 내용은 극재의 예술관과 인간관과 연결된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 여름 대구에서 기이한 그림 한 장을 발견했다. …(중략)… 교도소 바자회에서 구입했다는 죄수의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상업적인 것이었지만 기술적으로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 스스로가 익힌 서툰 솜씨로 주제를 다루느라 안간힘을 다 한 흔적이 그린 사람 특유의 수적(手迹 manner)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런데 이 서툴다는 사실에 대한 자책은 그로 하여금 더욱 열과 성을 다한 밀도로 그림을 엮어내게 했으며 이 인간적인 성실성이 예술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생태적으로 예술은 시대나 사회와의 적극적인 접촉을 전제한다. 극재에게는 학교가 모종의 역할을 한 것 같다. 학교는 새로운 세상에 눈뜨도록 도와주는 정보의 담지체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의 교육이었지만 학교교육은 현실을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지표를 제공했다. 즉 새로운 예술을 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글을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일본의 기하학적인 큐비즘을 비롯해 환상적 심리적인 쉬르레알리슴이나 아나키anarchy한 다다이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가 이 땅에도 등장하면서 그것에 홀린 미술학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도 그들과 같은 경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중략)… 말하자면 그것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예술의 방향이었다.”(정점식, 「화가의 수적」(자서적 단상-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 아트북스 2002년, p222.) 또한 극재에게 학교교육은 일본 제국주의가 표방하는 관전(官展)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에도 힘이 되었다.

극재미술관전시장면
2017년 10월 극재미술관 전시 장면(극재의 흔적들).
서영옥 제공


앞선 지면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극재는 1900년 초·중반 한국미술계에 모더니즘의 싹을 틔운 선두주자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전쟁과 5.16혁명 등 엄혹한 격변기를 겪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의 맥을 이어낸 주인공이다. 감정을 승화시킨 추상미술로 지역화단의 후배와 후학들에게 그 정신을 물려주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비로소 이겼다는 극재(克哉)의 아호에도 알 수 있듯이 극재의 예술 속에 드러난 부단한 자기절재와 삶의 변주는 쉬는 법이 없었다.

극재의 예술 활동 초기에 해당하는 50년대는 그가 한국 화단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이다.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를 다룬 서적에서 극재는 1957년에 발족한 모던아트협회를 중심으로 거론된다. 1957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분수령 같은 해이다. 1957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여파 속에서 관료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던 한국 제도권 미술계에 대항하여 여러 재야단체(모던아트협회, 창작미술협회, 신조형파, 현대미술협회 등)들이 대거 등장한다.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재야미술단체들은 당시의 진부한 형식주의 리얼리즘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극재는 혁신적인 태도로 1955년에 이미 ‘대구미술가협회’를 발족하였고, 같은 해 7월에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은 연다. 1957년에는 조선일보사(전국 규모의 언론사)가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초대되었다. ‘모던아트협회’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한 것은 지방작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와 같은 활동을 계기로 현대미술의 격동적인 변화에 동참한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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