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 서양미술 받아들이되 끝까지 고수한 한국적 기품
[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 서양미술 받아들이되 끝까지 고수한 한국적 기품
  • 황인옥
  • 승인 2018.05.1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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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화가 1세대임에도
어린시절 익힌 전통서예 덕
작품 전반에 동양정신 투영
한국작가 美 순회전 출품 등
1960년대 서양과 잦은 접촉
70년대 추상·반추상 동시 작업
1999년 극재미술관 문 열어
며칠 전 극재술관에서는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 Artech College 교수초대전(2018년 5월 8일~5월 18일)이 열렸다. 작품 감상을 하고 나오던 타블라라사 칼리지 소속 박교수(60대)가 미술관 입구에 세워진 故극재(克哉) 정점식(鄭点植) 선생(이하 극재)의 흉상(胸像)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 말이 생생하다. “점잖고 말이 없으셨던 극재 선생은 화가이기 전에 철학자셨습니다.” 그 순간 극재의 흉상에 고인의 기개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고인이 되어도 삶의 궤적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 그 궤적이 후대로 전해진다. 이런 현상을 ‘영원한 삶’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무리일까. 흔적 속에 스민 기억은 종종 삶의 오고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극재미술관 앞 극재 흉상
극재미술관 앞 극재 흉상.

계명대학교에서는 1999년 대명동캠퍼스 동산관 1층에 극재미술관을 개관했다. 극재미술관은 극재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극재가 삶의 경계를 넘기 10년 전의 일이다. 블랙(black)홀과 화이트(white)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진 전시장에서는 개관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화이트홀 한켠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는 극재의 작품과 그가 쓰던 화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입구에는 2010년 6월에 제막식을 한 극재의 흉상(청동, 높이 1.95m(청동 부분 높이 75cm), 폭 50cm)이 놓여있다.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선생을 대하는 것 같다. 한때 멘토였던 스승의 발자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극재는 진정한 화가이자 스승이었고 성숙한 어른이었다. 5월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자매-1974년 캔버스에 종이 아크릴
정점식 반추상 작 ‘자매’

극재의 1970년 대 작품 형식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그중 <모자(母子)>(1971)(1975), <카리아티드>(1971), <군상들>(1975)(1977), <여인들>(1976), <두 여인>(1976), <나부>(1976), <자매>(1974), <사랑의 테마>(1977) 등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다수이다. <말>(1977)과 <해바라기>(1977), <꽃과 새>(1977), <새들의 노래>(1977), <학의 노래>(1977), <수목>(1977), <형상>(1978) 등은 인체를 소재로 하진 않았지만 형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반추상형식이다. 그 밖에 <무제>(1973)나 <하경>(1973), <발>(1973), <절풍>(1978), <허>(1974), <산>(1975), <입상>(1976) 등의 작품은 추상형식으로 분류된다. 극재는 70년대에도 온전히 추상형식만을 고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발1973년51-44cm캔버스에유채
정점식 추상작 ‘발’

극재의 이력 중 1960년대 활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서구미술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닐까 한다. 이를테면 1959년 ‘한국 작가 미국 순회전’ 초대 출품과 1962년 ‘현대 작가 자선(自選)작품전’(대구 미국문화원화랑), 그리고 1966년 경북문화상수상작가 초대전(대구 미국공보원) 등은 극재의 서구문화에 대한 관심과 접촉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미국공보원에는 [Art in America]와 같은 잡지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극재는 이곳을 드나들며 미술잡지를 통해 당시 서구미술의 동태를 살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57년부터 1985년까지 대구 미국연구회 회원과 전임이사 역임과 대구 미국연구회 예술분과장 및 유네스코 대구위원회 문화분과장(1968-1976)을 지낸 이력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데 한몫을 한다.

정치와 사회 문화 경제는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70년대 한국은 매스미디어의 보급으로 문화가 비약적인 변화를 보이던 시기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1970년 완공)되면서 유통업계가 발전하고 경제가 도약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1972년에 단행된 10월 유신으로 사회는 다소 경직된 분위기였다. 한편 미술계는 각종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고 국제미술교류와 더불어 미술애호가들이 늘어났다. 서울에서는 명동화랑(1970년, 김문호)이 문을 열었다. 1977년 화랑협회 창립에 이어 <현대미술>이라는 잡지가 발행되었으며 단색화 열풍이 일었다. 서울에서는 윤형근, 박서보,하종현 등의 화백이 단색화로 전시를 개최하는가 하면미술출판 활동도 급증했다. 반면 미술품이 투자대상으로 전락해 명작을 대상으로 한 상업주의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시 극재는 대구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 후로도 줄곧 대구지역에서 추상미술을 전개해 나갔다. 70년대 당시 극재는 서구미술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분별력 있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특히 열린 시각으로 한국인 고유의 정서를 녹여낸 것은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한결같다. 이것은 삶의 철학에서도 일관된다. 필자는 2017년 6월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극재의 두 딸(영주, 명주 자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고인의 딸들은 극재가 아버지이기 전에 존경하는 스승이자 철학자였다고 하였다. 자매는 극재가 가정에서는 과묵하고 엄격한 아버지였지만 열린 식견으로 미국유학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었고 평생 정신적인 지주로 존재했다고 회상했다.

극재가 작품 제작에서 선두에 둔 것은 형식보다 의미를 포함한 뉘앙스였던 것 같다. 생전에 필자와 나눈 대화에서도 그랬듯이 극재에게 작품은 작가에게 체화된 정서와 감정, 경험, 지식, 상념, 사유 등 복합적인 것의 소산물이다. 이런 극재의 작품에서는 서구 모더니즘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동양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작품 스타일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극재는 1923~1925년(6~8세) 청송(聽松)이라는 호를 가진 강씨 성의 고모부가 가르치는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운바 있다. 극재의 작품 속에 투영된 동양정신과 한국적인 정서의 토대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운 시점부터로 상정해야 할 것 같다.

서예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구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다.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잘 쓰기 위한 수단이나 기교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한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전통서예는 기교보다 정신수양과 인격함양이 우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기도 하다. 극재가 서예를 배우면서 체화된 그것이 내면에 잠재되어 내적 성장에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극재에게서 풍겨져 나오던 꼿꼿한 선비의 기품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처럼 유년기에 체화된 관습은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 동양정신과 한국인의 정서는 극재의 세 번째 수필집인 <선택의 지혜>에 수록된 글 ‘한국미의 재발견’ 에서도 우러난다. 극재는 이 글 본문에서 한국미의 본질은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다’라고 적고 있다. 14쪽 분량의 글 ‘한국미의 재발견’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략)…그것은 인심 좋고 산수 좋은 자연적인 토양 밑에서 배양된 신화와 집단적인 생리가 이곳에 뿌리하고 살아오면서 엮어낸 삶의 음양이며 은은하고 맑은 숨결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멀어지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해도 뒤따라오면서 귓전에 연연히 메아리치는 향수처럼 가슴에 닿은 아름다움이다. (하략)” (정점식 에세이 3 <선택의 지혜> 본문에서)

서영옥ㆍ미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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