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기일 맞아 산을 오른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거슬러 고왕(古王)
아득한 시간 속에 절이 있다
백제의 왕자, 융이 숨어 있었던 곳
아버지도 숨어 있었지, 병실에
나당연합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삶은 죽음과 손잡고 한순간 덮쳐버렸지만
그때, 그의 왕국도 명을 다했지만
가벼워진 혼 하나 말을 타고 대륙으로, 대륙으로
마르지 않는 핏줄의 강 거슬러
당도했을까,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상류에까지 다다르면
흉노족의 말발굽 소리 땅을 울리고
천년 신라, 김알지의 알 속에도 선명한 말발굽
운이 다했을 때 흉노는 살 길을 터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지만 사라진 왕국
아버진 멸망한 왕조의 후예로 생이었다
굴욕과 비탄의 세월을 갈기 삼아 바람에 순응한 아버지, 내 핏속으로
말을 몰고
고왕암에서 추억을 떠올릴 때 흉노는 온다
바람이 불거나 함박눈에도
꽃잎 흩날리는 햇살 속에서도 흉노는
말이 쓰러져도 흉노는
◇김미지 = 대구 출생. 199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문>
<해설> 몽고고원을 바람처럼 웅혼한 기상으로 누비던 흉노족 피가 우리 가슴에 흐르듯 한 세대의 흥망성쇠 또한 우리들의 역사가 그걸 고증한다. 역사는 거대한 스펙트르로 얼기설기 엮여져 있다. 화자 핏속에도 저 고대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재현적 역설처럼…. -제왕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