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린 개인전, 리안갤러리…한국 추상조각 개척자가 빚은 존재에 대한 질문
최만린 개인전, 리안갤러리…한국 추상조각 개척자가 빚은 존재에 대한 질문
  • 황인옥
  • 승인 2018.05.22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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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상처로 정체성에 집중

인체 훼손된 ‘한국적 이브’ 조각

1960년대 태극사상·서예 등 차용

한국뿌리 결합…추상조각 본격화

세포 분열·영속성 등 생명 주제

1970~80년대 연작 ‘태’, ‘0’ 공개
최만린_0
최만린 작 ‘0(zero)’



최만린
원로작가 최만린의 길고 길었던 정체성 찾기에 대한 여정을 듣노라니 숙연해졌다. 그의 조각인생 60년 과업은 자아찾기와 한국조각의 정체성 찾기였다. 사실 이 두 개념은 그의 조각세계를 떠받치는 지지대다.

60년 시간이 주는 중압감 때문일까? ‘그 긴 세월을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에 집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머뭇거렸다. 속도전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사는 세대의 습 때문 일수도, 개인 취향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래야만 했던 치열했던 당위성이 있었다. 6.25전쟁이었다. “전쟁을 겪고 남은 것은 상처였어요.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이나 생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됐죠. 그것이 나 자신을 찾는 길이고 내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조각 1세대다. 그래서 유독 치열했다. 한국 추상 조각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개척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조각과의 인연은 의외로 빨랐다. 중학교 때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 공부를 하고 온 박승구 선생이 부임해 오고, 최만린의 예술적 감각을 보고 조각을 권유했다. 1949년에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박 선생의 권유로 목조관음상 조각을 박 선생의 작품과 함께 출품해 입선했다. 조각 입문과 동시에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

그러나 삶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듬해 6.25전쟁이 났고, 그는 전쟁 통에 가족을 잃었다. 종전이 됐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절망과 상처뿐이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대학입시는 뒷전이 됐다. 그때 마음 속에서 스멀거렸던 것이 성직자의 삶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학교를 가야한다고 하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어요”.

성직자에 대한 동경은 상처로부터 왔다. 성직자로 살면 상처가 치유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츰 그것도 회의가 왔다. 종교에 대한 강한 신념이 아닌 바에야 그것도 일종의 현실도피일 수 있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차라리 흙을 두드리는 것이 더 정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학진학을 결정했다. “집안의 반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어서 일단은 비밀로 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했어요.”

미술대학 진학, 조각 전공은 모두 상처가 관여했다. 흙을 두드리다 보면 켜켜이 쌓여있는 상처가 털려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동경했던 상황과 달랐다. 그의 스승들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조각을 보고 공부한 세대가 아니었고, 그들은 일본 유학에서 일본인이 자신들의 시각으로 소화한 미켈란젤로를 배워와 후학들에게 단순 전달하는 교육방식을 취했다.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회의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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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린 작 ‘0’ 리안갤러리 제공


“일본을 통해 배운 미켈란젤로나 로댕을 따라하면 결국 아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금 서툴더라도 내 마음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판단했죠.” ‘서구적 조각의 이론이나 조형방법에 한국적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는 의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와 ‘한국조각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변화는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우선 연필, 자, 컴퍼스 등의 서양적인 도구를 작업실에서 치웠다. 읽던 책도 버렸다. 서양성으로부터의 결별이었다. 그리고는 한국인으로서의 최만린, 한국조각의 시원 찾기가 시작됐다.

“큰 강의 시원을 찾아가면 산골짜리 작은 샘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샘물을 만든 것은 작은 이슬방울이고요. 그 물방울이 생명을 움트게 한 원천이죠. 자아라는것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슬방울 같은 것에 찾아야 원천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당시 눈에 들어온 것이 다 해진 붓 한 자루였다. 서양 연필의 정확성 대신 어디로 먹물이 튈지 모르는 붓의 우연성에 주목했다. 붓과 우연성이야말로 한국조각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시원적인 매개가 되겠다 싶었다. 첫 작품은 ‘이브’ 연작이었다. 기독교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 대신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팔다리가 잘린 한국의 ‘이브’가 사람들을 맞이 했다. 그의 조각에 한국적인 것의 등장이었다.

“‘이브’를 통해 인체의 자세한 묘사나 직접적 형상의 재현은 배제하고, 대신 거친 표면의 표현적 양식으로 인체 자체의 물리적 현상보다 존재의 근원적 문제를 드러내려 했어요.”

‘이브’ 이후 1960년대 ‘천지’ ‘일월’ ‘아(Grace)’ 연작을 발표했다. 이 시기 인체와 작별을 고하고 추상조각으로 변모했다. 태극사상이나 서예의 서체를 도입하는 등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와 결합하며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형식적 토대 마련에 노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태’ ‘맥’ 연작을 통해 생명의 근원적 형태에 더욱 심층적으로 접근했다. 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점(Dot)’ ‘0(Zero)’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태(胎)’ 연작은 꿈틀대며 세포분열 하는 생명체의 역동성을, ‘0’ 연작은 우주적 차원의 영속적 순환, 태초의 우주 생성기의 비어있는 허공을 통해 생명의 본질, 초월적 의지에 다가갔다. 이 두 작품은 한국적 추상 조형의 새로운 지평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0년 조각 인생을 담담하면서도 진솔하게 펼쳐내는 그의 얼굴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품은 기운이 고결한 그의 작품이 겹쳐졌다. ‘우리는 누구이며, 한국 조각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한국 추상 조각에 구현하며 살아온 원로 조각가가 “고맙다”는 말로 자신의 조각 인생을 정리했다.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 조각을 시작해 60년 한국조각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그 시간이 한편 바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각이라는 사명을 흩트리지 않고 산 것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최만린은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는 오랫동안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1997~1999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도 맡았다.

한편 한국추상조각의 대가 최만린의 대대적인 전시가 리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대작들이 대거 소개되고 있다. ‘태’와 ‘0’연작을 중심으로 18점의 작품을 만나는 리안갤러리 전시는 7월 7일까지다. 053-424-2203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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