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8) 타인 의식 말고 내면에 집중…“예술로 너를 증명하라”
[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8) 타인 의식 말고 내면에 집중…“예술로 너를 증명하라”
  • 황인옥
  • 승인 2018.06.0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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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회적 잣대로 논할 수 없어
상업논리에 휘둘린 작가 정신 비판
강연과 글로써 자본주의 병폐 저항
1975년 문화부 국전 추천작가 선정
국내 최초 미술학도 장학금 마련
예술가 삶과 인간적 삶 고루 실천
에세이집 아트로포스의 가위
극재의 첫번째 에세이집 ‘아트로포스의 가위(1971년)’ 표지 뒷면.

앞서 언급한 ‘전체 그림에 속해 있는 조각들로 삶의 목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 알프래드 아들러의 말처럼 극재 정점식(이하 극재)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 면면을 보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1995년 12월 어느 날이다. 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이 필자를 연구실로 부르더니 조심스럽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는 밀봉을 한 상태였다. 필자 부부는 석사과정 중에 결혼식을 했고 극재 선생이 주례와 덕담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하얀 봉투는 양가부모님이 선생께 전한 감사의 표시였다. 극재가 그 봉투를 필자에게 내민 것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받아든 이유는 스승의 진심이 오롯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학생인 제자 부부의 앞날을 격려하는 스승의 온정이 묻어났다. 살다보면 삶이 헛헛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친밀했던 관계가 이기심으로 인해 소원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스승이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와 온정을 생각하곤 한다. 극재는 제자들에게 말없이 사람 된 도리와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곤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자신을 가리켜 ‘스승을 능가하지 못한 불쌍한 제자’라고 하였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도 있지만 ‘부모만한 자식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스승만한 제자가 있을까 싶다.

톨스토이는 저서 「인생의 길」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다.’라고 했다. 그렇듯이 인생이란 과정이며 그 과정 중에 변화되는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더하여 변화를 수용하고 성장을 도모하며 이해한 것들을 펼치는 것일 것이다. 극재도 톨스토이의 인생관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며 과정을 살아낸 예술가였다. 그런 그도 인간이기에 삶이 헛헛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70년대를 들여다보았다. 당시 그는 50대였고 계명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한지 15년째 되던 해이다. 가르침에 대한 신념도 단단하고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시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극재가 회상한 그의 70년대는 그다지 윤택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1979년에 그는 ‘내가 살아온 70년대’란 제목의 글을 언론(國際新聞)에 기고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극재는 1970년대를 ‘헝겊 보자기 속의 가위 자국으로 산산이 조각난 섬유의 파편 같은 추억’이라고 회상했다.

1971년 개인전 때 쓴 글도 삶과의 마찰을 언급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남들이 모르는 그림을 그리느니, 철 든 사람이 돈도 되지 않는 그런 그림을 그린다느니 하는 말들을 무던히 들으면서 오십 평생을 살아왔다. 사회적인 조리로 따진다면 당연한 충고이고 감사하다. 그러나 예술은 그와는 다른 경지에서 영위되는 세계라고 믿는다. 이런 역경에서 나는 어떤 삶에 대한 저항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저항을 생명에 대하는 원리, 말하자면 삶의 호흡과 마찰되는 데서 오는 가벼운 보람을 느끼고 살아온 것이다.” (一九七九, 國際新聞)
 

에세이집 아트로포스의 가위-2
극재의 첫번째 에세이집 ‘아트로포스의 가위(1971년)’.
서영옥 제공

위 글에서도 읽혀지듯 극재에게 70년대의 삶은 호락하지 않았다. 50대 이후에도 저항적인 삶의 태도는 여전했다. 이때 저항은 단순한 반항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물들어가는 인간들이 지켜야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다. ‘종교나 예술은 우리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 이라고 한 시각은 극재의 예술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극재는 예술로써 비실용적인 것의 필요성과 비가시적인 세계의 숭고함을 되새기며 실천한 것이다. 그가 ‘아무런 의도나 목적 없는 삶이었던 70년대’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극재가 명시했듯 ‘지능만을 믿고 살아가려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명 다름 아니다. 극재는 이러한 실태는 ‘현대문명의 물결이 지나치게 의도적인 목적에만 얽매여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글과 강연을 통해 물질문명의 병폐에 맞섰음을 고백한다.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미술의 호경기를 타고 날뛰는 많은 작가들에 대해서 그것을 경고하는 글과 몇 차례의 강연회를 가지기도 했다.” (「아트로포스의 가위」p.40)

2000년대 들어 연로해진 극재는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극재가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이다. 당시 병원 1층 복도 양 벽면에는 구상회화 여러 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극재의 제자와 후배들의 이름도 있었다. 문제는 작품 밑에 붙여놓은 가격표였다. 극재는 병실에 누워서도 그 점을 내심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다. 작품을 상품 취급하려는 화상들의 상업논리에 휩쓸리는 작가들의 예술정신이 문제라며 노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극재는 강의실에서도 같은 뉘앙스로 예술가의 살아있는 정신을 강조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예술로 존재를 증명하라는 말에 힘을 주곤 했다. 한편 당신 자신의 행보는 떠벌리는 일을 삼가했다. 극재는 위의 책(아트로포스의 가위) 속에 그동안 거리를 두었던 국전 추천작가가 된 경위를 소상히 밝혀놓았다. 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몰랐을 극재의 당시 심정은 다음과 같다.

“나는 1975년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원래 관전과는 관련을 맺지 않는 자유예술을 택하고 그것을 벗 삼아 살아온 내가 국전에 비구상부분이 신설됨에 따라 나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삼 이것을 수락하기에는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예술계에서 예순에 가까운 재야화가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과 한편으로는 교직에 있으니 추천작가라는 레텔이 교육적으로 어떤 신임을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하기야 그 후 몇 사람으로부터 여당으로 전회했다느니 배신을 당했다느니 하는 말들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이나 예술에 대해서 특별한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처사는 내 개인적인 고집보다는 교육자로서 홍익을 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트로포스의 가위」p.41)

더 놀란 것은 한국 최초로 미술학도를 위한 장학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70년대의 일이며 그 중심에서 선 사람이 극재이다. 당연히 상당한 자부심으로 극재가 추진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극재였지만 한발 앞서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극재는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한다.

“1977년에 나는 회갑(回甲)을 맞았다. 내 나이를 눈치 챈 동료들이나 제자들이 회갑전을 미술장학기금 모금을 위한 전람회로 하자는 논의가 되었고 동료나 제자들의 작품 백여 점과 내 작품 사십 점으로 그것이 실행되었다. 이것마저도 내 자의가 아니고 주의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 원래 가난하게 독립생활을 해온 나는 요즘 성행되고 있는 장학금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나같이 가난한 부덕의 존재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제정되는 미술학도를 위한 장학금을 지급한다는데 대해서 이상한 허세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재)장학회라는 관사(冠辭)로 붙은 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쑥스럽고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아트로포스의 가위」p.41)

극재의 예술은 추상적이고 다소 관념적인 면도 없진 않다. 혹자는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현학적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다각도의 견해는 극재 예술연구에 풍성한 결과를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에 인용한 극재의 글들이 증명하듯 극재야 말로 인문(휴머니즘)과 예술을 경계 짓지 않고 삶과 예술에 고루 실천한 스승이자 예술가였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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