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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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0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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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내 꿈은 햇빛이 잘 드는 방 한 칸 갖는 것
열여섯 자수 공장에 다닌 엄마 꿈은
머룻빛 비로드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것



소녀로 살고 싶은 마음
눈부신 빛 속으로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이
시이고 봄이고 어쩌면
병일지 몰라



나는 손가락으로 너의 손바닥에 ‘사랑해’라고 쓴다
너는 물 위에다 ‘영원’이라는 말을 적는다
문명의 디아스포라, 기러기들이 하늘에다 무수한 발자국을 남기고
이내 사라진다



빗방울의 박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밤중에도 운동장을 뛰고 있다



고통을 시로 옮겨 적는 이들이
저기 들판에 가득하여
쟁기를 들고 수레를 끌고
흙을 받는다 소금을 거둔다
소름 같은 땀방울을 이마로 퉁겨내며
조심조심 성큼성큼



매일매일 시듦을 견디는 나의 꽃들아
시시각각 비루함을 견디는 나의 창문아



빗방울에 새긴 글씨는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마가목 열매처럼 붉어진 두 눈으로 나는 응시하리라



어둠이 언제 희미해지는지
하찮던 창문에 언제 빛이 드는지
침묵하던 입술이 언제 발화하는지



그토록 차갑던 심장은 어떻게 뜨거움을 얻는지







◇김은경=경북 고령 출생.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 시집

‘불량 젤리’. 2016년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해설> 시를 쓴다는 것 지독한 고행일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이야기를 머리 싸매며 긁적여 놔도 보람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 시인들의 시 쓰기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시인의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시를 보며 이런 열정이면 언젠가는 명작 한 편 남길 것으로 믿는다. -정광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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