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재 정점식 <12> 시인을 꿈꿨던 화가, 그의 미의식은 어디서 왔나
극재 정점식 <12> 시인을 꿈꿨던 화가, 그의 미의식은 어디서 왔나
  • 황인옥
  • 승인 2018.07.04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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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語처럼 ‘화가만의 어휘’ 강조
박목월과 어울리며 보들레르 읽고
피카소와 클레의 작품 특히 선호
이중희 “60대 前 미의식 정립 안 돼”
김영동 “40세에 그린 작품 ‘실루엣’
추상미술 역사 기념비 수준” 극찬
극재-자료제공-서영옥
2008년 시를 적어주는 극재. 서영옥 제공


대구지역 미술사를 조명하는 학술포럼이 지난 6월 28일(목) 학강미술관에서 열렸다. 2018년 석재기념사업회 연속포럼의 일환이다. 이날 강연의 주제는 ‘석재 서병오(1862~1936)와 상해화단’이었고 이인숙 박사가 발제를 했다. 10월에 같은 장소에서 ‘전후미술 이중섭, 정점식, 장석수’라는 가제로 강연이 예정되어있는 필자에게 이박사의 연구는 의미 있고 유익했다. 석재의 행적을 더듬는 일은 극재보다 앞선 시대를 산 대구의 예술가를 조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서예와 서양화라는 다른 장르가 추구한 창작의 범주까지 점검하게 했다. 강연 후 참석자(홍종흠, 권정호, 김영태, 장경선, 류재학, 이인숙, 김진혁 등)들은 난상토론에 이어 수순처럼 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으로 화재를 돌렸고, 다양한 추억담들이 쏟아져 나왔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담화를 정리하면 이렇다.

“오래 전에 극재 선생님의 수필집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단어와 내용을 나이 70이 된 지금에서야 이해를 하게 됐다. 그만큼 극재 선생은 해박하고 지식이 풍부한 학자였으며 사고가 앞선 예술가였다.” (前영남대 교수이자 現소헌미술관 김영태) “말이 곧 시와 같았던 극재는 시인지망생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표현이 시인들보다 월등했다. 그는 대구 아카데미극장 앞 골목에 자리한 카페에서 김기림과 박목월 등의 시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퍼도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극재는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예술가였으며 종종 어려운 문장을 통째로 외워서 들려주곤 했다.” (前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 홍종흠) “고등학교와 대학교 스승인 극재는 피카소 얘기를 자주 했다. 한때 근무했던 계성고등학교 벽에 클레의 작품을 번안해서 그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만큼 극재는 피카소와 클레를 무척 좋아했다. 전쟁 직후 1960년 당시는 어수선한 시국이었던 만큼 학위를 제대로 갖춘 미술 교육자가 드물었다. 대구에서 활동한 작가는 극재 선생을 비롯해서 주경, 서석규 등 100명 미만이었다.” (극재의 아들과는 친구이자 前대구미협회장이고 前대구대교수였던 권정호) 실제로 극재는 피카소를 수필집 곳곳에 언급해놓았다. 필자도 극재가 통째로 외워서 들려준 시들을 기억한다. 그 중에서 특히 보들레르나 클레의 시가 많았다. 예술가이자 교육자였던 극재는 세월이 가도 후학들에게 짙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일생 중 4·50대가 예술표현의 절정기로 본다면 극재는 1980년 즉, 60대가 되어서야 작품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그 이유를 극재에게 60대 이전은 ‘미의식의 미정립’ 시기였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60대 후반기 이 만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인 스스로가 예술적 표현에 자신감을 얻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이전의 긴 젊은 시절에는 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미의식의 미정립으로 불안정한 ‘탐구’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이중희, 극재미술관 개관 기념 정점식 화백 작품전, 2008년, p12.) 그럴만한 가능성도 열어두지만 반드시 그럴까 하는 반문도 제기하게 된다. ‘탐구’의 시기임을 애써 부정하지 않더라도 ‘미의식의 미정립’만은 유보하게 되는 것은 극재가 남긴 네 권의 수필집이 그 이유를 방증하기 때문이다. 네 권의 수필집 중 두 권은 1980년대에 출판했다.『아트로포스의 가위』(흐름사, 1981)와 『현실과 허상』(도서출판 그루, 1985)이 그렇다. 두 권에 수록된 글 중에는 연대를 표기하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는 글들도 다수다. 그 중 80년대 이전 즉, 1970년대에 쓴 글 중에 극재의 예술철학이 담긴 내용을 찾아보았다. 1974년 ‘二次的인 現實(이차적인 현실)’이란 제목을 단 글을 보면 이렇다.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술계를 휩쓴 거인예술을 대신해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팝 아트(Pop Art)와 같은 새로운 물결, 말하자면 반묘사적인 양식이 그 번식작용을 한층 상승시키고 있다. 물론 이 사실을 두고 새로운 시대 공통의 생활감정이라고 한다면 나도 할 말을 잃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러한 유형의 바람이 예술의 기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자기가 놓인 사회의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 필연적으로 우러나는 비전이 없는 뉴욕이나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술의 동태에 대해서 민감한 나머지 자신을 맹목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작업은 자기의 눈이나 마음으로 살아있는 소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물질화하고 평가한 것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조형예술이 언어의 장벽을 해소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반면, 자기의 어휘를 갖지 못한 시인은 자기의 시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이 약은 조심성, 말하자면 소위 파괴에서 얻는 가산(加算)의 예술 창조의 모험과 그 진실을 감히 행하지 못하는 ‘약은 조심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평가된 절대가치를 위조하려는 심사인지도 모른다. 모방이나 선택이라는 것이 예술행위에 있어서 불가분의 매개가 된다고는 하지만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것을 집약하고 실화시켜서 자신의 어휘를 만드는 일이며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다.

내가 어떤 젊은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비판을 했을 때 그 화가가 말하기를 이것이 파리의 새로운 경향이라는 변명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파리의 이 새로운 경향을 조성한 사람이나 그 이유가 누구인가가 문제이지 이 국적불명의 모방을 한국에 옮겨 놓은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최신유행의 옷을 입고 뽐내는 태도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방가르드(Avant Garde)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나 국가나 민족성을 망각한 국적불명의 연기자의 것일 수 있다. 우리들 특히 후진성에 떨어져 있는 민족들은 남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지나치다. 그것으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절충적인 그 무엇이 될 것이며 이 절충이라는 과정에는 언제나 통속성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一九七四1974), 정점식, 『아트로포스의 가위』,흐름사, 1981, pp11~12).

같은 책에 수록된 1977년에 작성한 글 ‘無償의 作業(무상의 작업) 외에도 ‘나상의 미학’도 참고할 만하다. 위에 인용한 글 ‘二次的인 現實’에서 극재는 ‘자기의 어휘를 갖지 못한 시인은 자기 시를 쓸 수 없다’고 하며 극재 자신이 아방가르드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그것을 수용하는 주관적인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술의 통속성을 뚜렷하게 견지하고 있다는 것도 내비친다.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극재의 1957년 작인 <실루엣>(패널에 유채, 85×5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에 ‘당당하고 눈부신 추상미술의 성취’라는 제목을 달고 “형상과 공간의 비례에서 균형감이 빚어낸 이상적인 조화나 표현의 절제 등 조형적 통제력이 아주 돋보이는,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기념비가 될 만한 작품으로 생각된다.”며 80년대 이전에 제작한 극재의 작품을 그의 저서 ‘근대의 아틀리에’(한티재, 2011, p259)에서 극찬했다. 극재의 미의식과 예술적 내공은 이미 1980년대 이전부터 정립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극재가 1960~70년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점도 이러한 짐작을 뒷받침해준다.

1977년 경향신문에 발표한 ‘藝術家의 奇癖(예술가의 기벽)’에서는 극재의 작업재료와 작업습관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유동적인 아크릴물감을 쓰고 있다. 따라서 이젤 위에 캔버스를 얹어 놓고 그리지 못하고 ‘루오Georges Rouault’처럼 마루바닥에 캔버스를 눕혀놓고 제작을 한다. 그것도 눕히고만 얌전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눕혔다 세웠다 하면서 부산을 떨면서 제작을 한다. 한번 작품을 시작하려면 어떤 충동이 필요한 것이며 그 충동은 잠이 오지 않을 때 한밤중에 갑자기 오는 일이 많다. 온 가족이 잠자는 한 밤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제작을 시작한다. 잠자는 식구들이 깨지 않게 조심을 하지만 식구들은 번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말하자면 바가지를 긁는다.” (정점식,『아트로포스의 가위』, 흐름사, 1981, p23) 형과 색이 서로 다투지 않고 속박도 없는 극재의 작품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거짓으로 꾸며내지 않아 심심하고 부담도 없다. 고요한 밤중에 번민을 녹여낸 자유의 경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경청하게 하는 극재의 작품 활동은 1990년대로 이어진다.

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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