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는 치명적 슬픔을 담고 있다
잎사귀마다 구멍 숭숭
누가 저 하늘 구멍을 열었을까
저렇게 구멍 하나둘 내어놓고 숨어 살까
나는 내용 없는 쓴 웃음을 지으며
배추 속살을 이리저리 헤집어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문득 배가 불룩한 민달팽이 한 마리
나를 쳐다본다
아하, 저놈이 구멍을 열어놓고 하늘과 내통하고 있었구나
나는 얼른 그놈을 잡아내고는
배를 툭 친다 배를 오므린다.
배를 한번 더 세게 친다
번쩍하며 초록빛 하늘이 열리고
그 속에서 배추들이 아우성치며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민달팽이는 지독한 징그러움이 있다
옷 한번 걸친 적 없는 그가 어찌 저렇게 치명적 전율을 일으키게 할까
◇제왕국= 경남 통영 출신. 시민문학협회 자문직을 수행하고 있는 작가는 한국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시집 <나의 빛깔> <가진 것 없어도>등이 있다.
<해설> 정성으로 가꾼 배추가 어느 날부터 잎사귀에 시골집 돌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원인 제공자가 누구일까를 노심초사하지만, 화자는 짐짓 배추흰나비일거라 추정한다.
그러다가 배추를 샅샅이 살펴보니 범인은 민달팽이였다. 옷 한번 걸친 적 없는 민달팽이가 구멍 숭숭 내어놓고 하늘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민달팽이를 죽임으로써 이 시의 반전이 일어난다. 그동안 먹임 당한 배추들이 아우성치며 와르르 쏟아져 나왔던 것이 그것이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감성으로 가득 채우게 되는 것에 이 詩의 순수서정의 에스프리(esprit)가 있다. -성군경(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