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 승인 2018.07.1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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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 (사람향기 라이프디자인 연구소장)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에너지 넘쳤던 내가 얼마 전 지쳐버렸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쳐져 있는 내 모습을 보자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긴 시간 동안 참고 살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주 조금씩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무얼 해도 즐겁지 않았다. 강의를 해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사람을 만나도 즐겁지 않았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참 오랜 시간 많은 역할이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돌아보니 제법 그럴싸하게 그 역할을 소화해 왔었던 것 같다. 사람들도 그런 나를 통해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퍼주기만 했나 보다. 어느 날 고갈이 되어 버렸다.

고갈된 이유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쉼 없이 강의를 해온 많은 양의 강의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쉬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쉬어도 마음이 답답하고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막혔다. 그것이 아니면 무얼까? 그러다가 연세가 90세가 되셔서 이제는 어린애 같아져 버린 아버지 건강 때문 일거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 거 같았다.

한 달여 전부터 아버지는 잘 걷지 못하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다. 어떤 날은 이러다가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기력이 약해지셔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지에 변을 보시기도 했다. 하루에 세 번을 바지에 변을 보신 날도 있었다. 버린 바지를 맨손으로 빨면서 10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사랑하는 울 엄마는 뇌졸중으로 7년 고생하시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몸이 굳어 거동이 되지 않아 기저귀를 차고 생활하셨다. 기저귀를 갈고, 몸에 묻은 오물을 닦으며 많이 힘들었다. 그 힘듦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어머니가 보신 대변을 치우든, 사래가 들려 기침을 하며 입 밖으로 나온 음식을 치우든 몸은 힘들지 않았다. 더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나를 힘들게 했다. 울 엄마의 아픈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금의 아버지 역시 그때처럼 나를 힘들게 했다. 쩌렁쩌렁하던 그 목소리 어딜 가고, 모기소리 같이 작아진 임종 직전의 모습을 하던 울 아버지를 보고 있으려니 힘들었다. 힘들고 지친 것이 그것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모를 답답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생각의 숲을 돌고 돌아 힘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속에 오랜 묵은 기억이 있었다. 그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놈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랬구나. 그 기억 속의 어린아이가 힘든 것이었구나. 때묻은 묵은 기억을 끄집어내어서 깨끗이 빨래를 함께할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누구 앞에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잘 알고 있는 심리전문가 교수님을 찾아 나의 이야기를 나눴다. 봉인해둔 이야기를 모두 끄집어내었다. 그 교수님은 그저 공감해주시고 들어주셨다.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내 속에 켜켜이 쌓인 말할 수 없었던,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몇 시간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날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리고 며칠 뒤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니 이런 답이 왔다. “늘 교수님 편이에요”, “있는 모습 그대로 좋은 교수님~~^^”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몇 번을 다시 읽어 봤다. 그래 있는 그대로!! 뭔가 시원하게 씻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역할들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해야 했고, 저 사람을 만나면 저렇게 해야 했다. 그들이 요구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해야 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기보다 오랜 시간 역할로서의 나를 인정받아 왔던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고,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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