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따다가
고추 따다가
  • 승인 2018.07.1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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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국



고추를 딴다 /가을이다 고추잠자리도 날지 않는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나는 유연히 창골산을 바라본다 /저 뜨거웠던 여름을 따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여름 계곡에서 떠나보내는 것 /가을의 채비를 서둘고 있는 것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며 /어느새 내 콧속에는 고추가 살고 있었다 /고추의 그 따끔한 향기 /내 콧속에 산다 /고추를 따며 고추의 매끈한 속살을 만져보는 것은 /희한한 경험 속에 든다

고추는 왜 매울까 /매우면서 달콤한 고추 이야기 하나 /어느 날 산골 소년가 이야기속의 고추 하나를 달고 있었다 /여리디 여린 고추였다 /한입 베물며 가슴이 뜨거웠던 소년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도 몰래 옆집 소녀에게 그 뜨거운 고추 맛을 보여겠다. /그리하여 소년가 고추도 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소녀는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소년 가슴엔 알 수 없는 맵은 것이 울렁거리게 되었다 /그게 그리움의 속앓이처럼

고추를 딴다 /하늘에 먹구름이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허리를 펴며 /고추도 때론 매운 생각에 젖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제왕국 = 경남 통영 출신. 시민문학협회 자문직을 수행하고 있는 작가는 한국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시집 <나의 빛깔> <가진 것 없어도>등이 있다.



<해설> 몇 년 전부터 화자는 고향에 자그마한 텃밭 하나 마련했다. 자급자족하고도 남아 이웃에 나누어주는 재미가 쏠쏠했단다. 땡초 오이고추 등 종류별 서너이면 충분한데도 화자의 아내 등쌀에 근 200여주를 과분하게 심어 알게 모르게 경비가 상당히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심은 고추가 붉은 고추를 주렁주렁 달았다. 별로 거름한 적도 없었는데 제 소임을 충실히 다하는 고추를 볼 때 화자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화자는 게으름에 젖은 삶을 후회하며, 튼실한 가계 하나 세우지 못한 세월을 한탄했을 것이고. 새삼 고추의 매운 맛이 화자 코끝을 자극할 때마다 젊은 날의 회상이 끓어올랐을 것이다. 이 시의 소년은 화자가 환치되어 현신한 것이라 짐작된다. 젊은 날의 아픔 등이 잘 빚은 항아리에 곰삭아 매콤한 향기가 진동하듯 보편적 일상성이 순수서정의 감성을 완성하는데 주지하는 바가 크다. -성군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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