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여우
은빛여우
  • 승인 2018.07.1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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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버려졌죠, 서른 살 된 미아를 보신 적 있나요? 여섯 시간을 날아서 다시 붉은 사막의 지붕위로 가출했죠.

야자수처럼 번져나간 파고다의 도시. 붉은 파고다의 골목. 뒷골목마다 부처님이 앉아계시죠. 미얀마 사람이 아니랍니다. 맨발로 타조 발자국처럼 모래를 푹푹 찍으면서 걷다보면 천 번째 살고 있는 정령(精靈)을 만날지도 모르죠. 당신에게 인사를 건넨 건 부처거나 정령이거나 흰 암소 중의 하나겠죠. 모래위에 다시 그늘을 펴주는 친절한 티크나무와는 몇 년째 정이 들어버린걸요.

서른 살 된, 부모 있는 고아는 못 보셨다고요? 백장의 이력서도 편의점의 컵라면도 이젠 몸이 거부하죠. 위장도 그렇게는 살고 싶진 않았겠죠. 삼천 원으로도 넉넉한 하루는 모래 위뿐이죠. 서울은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는 거라니깐요!

더 듣고 싶다면 저를 따라 오세요.

지평선 끝에서 노을이 올라오면 가장 높은 탑 위로 올라가죠. 그러면 시리아 산 배낭 두 개가 전부인 압둘라 크루디와 그의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죠. 매일 저녁 우리는 붉은 사막을 건너오는 여우를 기다리죠. 여우가 자꾸 여유로 들린다고요? 난 은빛여우, 크루디는 푸른 별이 두 개 달린 흰 여우를 기다리죠. 두 사람은 아직 자기조국을 사랑하나 봐요

아저씨도 이리로 오세요. 남서쪽으로 여섯 시간만 날아오세요. 사막위로 붉은 지붕이 열려있죠. 우리가 잠들 수 있는 파고다는 넉넉하죠. 가장 높은 곳에서 노을을 보고 있는 은빛여우를 찾으세요. 별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빈방 하나 내드릴 수 있죠.


◇박승민 = 경북 영주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해설> 붉은 파고다가 숲처럼 늘어져 있는 믿음의 나라 미얀마.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부족함 없이 살아도 가난하다는 부류가 있고, 너무 가난해서 끼니를 걱정해도 행복하다는 부류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되어. 넘치지만 어딘지 불안하고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나라다. 화자는 은빛여우, 여행지에서 느꼈을 해방감에 서른의 자식을 그곳에 고아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 자유로운 심상의 땅에…. -정광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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