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펜으로 신문 지우며 침묵 속으로… 우손갤러리 최병소展
연필·펜으로 신문 지우며 침묵 속으로… 우손갤러리 최병소展
  • 황인옥
  • 승인 2018.07.1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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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저항 의미 담아

신문지 글자 지우기 돌입

대량생산 시스템 비판
CHOI-Byung-So
신문지 표면에 선을 그으며 지우기를 하고 있는 최병소 작가. 그의 전시가 우손갤러리에서 9월 29일까지 열린다. 우손갤러리 제공


색을 삼킨 블랙홀 같았다. 오직 검정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항변하는 듯, 모든 색을 삼켜 버렸다. 그러나 암흑이 주는 무게감이 강렬하지 만은 않았다. 손가락만 닿아도 바스라질 것 같은 얇은 물성이 무거움의 농도를 낮춰주고 있었다. 수십 번 반복해서 칠하는(지우기) 과정에서 견디지 못하고 갈라진 틈과 가열된 내부 열에 폭발하는 분화구처럼 우둘투둘 튀어 오른 표면에서 희미한 연민마저 번졌다. 원재료인 신문지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검정 평면만 남은 최병소의 작품이다.

작가 최병소 초대전이 우손갤러리에서 시작됐다. 전시장에는 최초의 침묵, 존재의 근원으로까지 회귀하는 신문지 작품과 대량복제를 비판한 70년대 중반 설치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최병소는 사회 곳곳의 사건 사고 뉴스가 인쇄된 신문지 표면 위를 볼펜이나 연필로 반복적으로 선을 그으며 글자를 지워내는 작업을 한다. 신문지 작업은 40년전인 30대에 처음 시작했다. 그의 신문작업은 일종의 항변이었다. 신문으로 세상 읽기를 즐겨했던 그에게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은 신문의 진혼곡과 다르지 않았다. 그 항변으로 독재정권이 자행한 신문용지 위의 탄압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70년대 신문이 재미가 없어졌다. 권력의 입맛에 맞는 신문이 됐다. 내가 죽어버린 언론에 가할 수 있는 항변이 볼펜으로 지우는 것이었다”며 그가 한숨을 토해냈다.

물감과 붓과 캔버스의 자리를 신문지와 볼펜과 연필이 꿰찼다. 그가 미술의 기본요소를 과감하게 버리고 허를 찌르는 낯선 재료로 대체한 이야기를 “예술이 인생보다 더 짧을 수 있다”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틀렸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예술을 고정관념에 가두는 것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다.

그가 “예술은 고정관념을 벗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몰라야 보인다”는 안개 속 같은 말도 했다. 말인즉슨 고정관념에 함몰되면 예술 본연의 임무인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 그에게 신문과 필기 도구의 만남은 ‘자유’에 대한 실천이었다.

80년대에 신문작업 대신 회화작업으로 잠시 눈을 돌렸다. 신문작업이 대중성이 낮기도 했지만 싫증도 한몫했다. 전시를 약속한 어느 갤러리의 규레이터와의 갈등으로 세상과 단정하고 은둔형 작가로 작업만 하던 시기였지만 이 시기 치열하게 회화작업을 했다. 다시 신문 작업으로 회귀한 것은 90년대다. 다수의 갤러리에서 신문지 작품 전시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다.

그러나 90년대의 신문지 작업은 70년대의 작업방식과 달라졌다. “신문용지의 두께가 두꺼워 지면서 앞면만 지웠던 70년대 방식으로는 느낌을 살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앞뒷면을 다 지우는 방법으로 바꿨죠. 신문지 대신 인쇄되지 않은 신문용지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최병소
신문지 표면에 선을 그으며 지우기를 하고 있는 최병소 작가. 그의 전시가 우손갤러리에서 9월 29일까지 열린다. 우손갤러리 제공


작업 할때 뜨거워지는 지점은 작가마다 다르다. 머리거나, 가슴이거나, 몸이거나. 최병소는 몸으로 작업한다. 숨 쉬기나 걷는 행위가 본능이듯 그의 몸 작업도 본능에 가깝다. 거창한 의미를 더하기보다 본능적으로 신문 표면을 지워낸다. 행위가 반복되면서 상념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심신에 고요가 자리를 잡는다.

신문지에 선을 그으면서 인간 최병소의 내면이 정화되었다면 신문지에도 비슷한 변화가 찾아온다. 침묵이다. “신문 위에 선을 그을수록 시끄러운 세상사가 지워지고 종국에는 무거운 침묵만 남게 되죠.”

혹자들은 최병소의 작품을 단색화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그는 1974년 대구에서 최초로 열린 현대미술제인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멤버로 전위적인 예술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신문지 작업 역시 미술의 고정관념에 대항하며 나온 결과물이다. 신문지라는 대량생산물을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로 만들며 산업화 시대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비판하고,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을 에둘러 항거한 것. 전위적인 작가 최병소의 전시는 9월 29일까지. 053-427-773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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