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들
양파들
  • 승인 2018.07.2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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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들, 자진하느라 냄새를 피운다
한동안 다용도실이 권력의 중심이다
진동하는 포자들로 실내를 장악할 뿐,
국기 문란이라며 엄포를 놓거나 전경을 동원하거나 하진 않는다

설사 권력을 남용한다 한들
상해가는 양파들의 운명이란 풍전등화와 다름없을진대,
이 와중에 바람 앞 촛불의 위태로움을 논했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똥파리들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냄새란, 대면보고 같은 게 원체 필요 없었다
전격적이지만 내성적이기도 해서
은밀하지만, 고집불통일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었다
진실이란, 어차피
까놓든 벗겨놓든 거기서 거기라는 게
확고한 신념이자 그럴듯한 저들만의 논리였던 셈



다만, 양파는 자신의 거취 따위를 남에게 묻지 않는다
변명 같은 건 끝내 없었다
대저 목숨 가진 것들의 가야 할 길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는 거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처럼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어머니께선 양파가 더 상하기 전에
장조림이라도 담가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개들에게는 겨울 내내 선입견이 없었다**
애꿎은 날씨는 유독 추운 겨울을 예고했고
우리 집엔 아직도 양파들이 넘쳐난다



*이형기 「낙화」

**이장욱 「뼈가 있는 자화상」





◇엄원태= 1990년 ‘문학과 사회’ 등단. 시집 ‘물방울 무덤’,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등이 있음.



<해설> 다용도실 바닥을 온통 점령한 양파가 눈에 선하다, 냄새는 둘째 치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고, 거기 한술 더 떠 냄새 맡고 달려드는 똥파리는 어쩔 것인가. 그 양파가 왠지 낯설지 않게 다가옴은 상대가 시인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이형기의 [낙화]를 떠올렸고, 이장욱의 [뼈가 있는 자화상]을 떠올리며, 인생의 오고 감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니 어찌 시인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양파껍질 벗기듯 시인의 앞날에도 빛남이 있기를 빌어본다 -정광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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