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재 정점식 한국회화의 자생적 길을 탐색한 예술가이자 교육자
극재 정점식 한국회화의 자생적 길을 탐색한 예술가이자 교육자
  • 서영옥
  • 승인 2018.07.26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 추상미술의 선구자
동서양 개념 상호보완 활용
보수적인 화단에 도전하며
예술의 본질과 원형을 찾고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 제시
스승에 보내는 존경심
영화제 포스터화·의류 제작…
제자들, 극재作 재생산하기도
2006년 대전시립미술관-극재 초대전 포스터
2006년 대전시립미술관-극재 초대전 포스터.


1990년대 5월 어느 하루였다. 제자들은 대구 일송정(현재 일송명가 식당)으로 故 극재 정점식 선생님(이하 극재)을 초대했다.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들이 마련한 훈훈한 밥자리였다. 식사에 덕담이 보태어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극재가 홀연히 사라졌다. 무르익은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밖으로 나간 극재가 밥값을 먼저 계산하고 귀가를 한 것이다. 대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극재는 어른인 당신으로 인해 어린 제자들의 언행이 불편하진 않을까 하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1998년의 일도 잊을 수 없다. 당시 필자는 모교가 아닌 타 대학교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다. 어느 날 극재가 필자를 부르더니 편지봉투 하나를 건넨다. “이거 학과장님께 갖다 드려라” 하며 내민 것은 극재의 자필 추천서였다. 이미 강의를 하고 있었지만 낯선 곳에서 강의를 시작하는 제자에게 보내는 노 스승의 응원 다름 아니었다. 극재의 세심한 배려는 그를 존경하던 제자들에게 암묵적인 가르침으로 전달 되었을 것이다. 극재가 두고두고 스승으로 기억되는 이유이다.

극재를 존경하고 그의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례는 학교 밖에서도 확인된다. “내 인생의 큰 스승이자 한국 미술의 큰 별이었다”고 한 패션 디자이너 박동준은 극재 작품의 이미지를 자신의 패션 작품에 새겨서 선보였고, 김현옥은 멀티미디어 공연으로 극재를 기렸다. 학강(學岡) 김진혁(現 學岡美術館 대표)은 남문시장 근처의 중고서점에서 극재의 유품인 서적 수 백 권을 발견하고 수집한 후 다리미로 다리고 한지를 덧붙여 보관하였다가 ‘극재 정점식 아카이브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최순대 부산국제영화제 미술감독이 디자인한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공식 포스터의 원화가 바로 극재의 작품 <밤의 노래>였다는 사실도 필적할만하다.

김인하(전 경남도립미술관 관장, 2012년)도 극재를 존경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극재의 집에서 본 낡은 선풍기가 마음에 걸린다고 하자 새 선풍기와 꽃무늬 남방을 사들고 간 차규선 작가를 비롯하여, 멀리 있는 자식들을 대신해 가끔 극재를 병원으로 모셨다던 박철호 작가가 이동훈 미술상 시상식 때도 박동준이 내어준 자가용으로 차규선과 함께 대전까지 극재를 모셨다는 후일담을 들려준다. 모두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자발적 존경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극재가 계명대학교 전임시절 동 대학교 강사였던 이영륭(現 계명대학교 명예교수)은 벽(壁)동인의 주요 멤버였다.(1961년~64년) 전통화단에 반하는 ‘앙그리(Angry Young Man, 1963년) 결성에 이어 1972년 新潮미술협회 창립 등, 만만치 않은 여정에도 곁에서 그를 지지를 한 극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쿠테타(벽 전)를 주동한 것은 ‘벽전’, ‘서클’, ‘60년 전’ 동인들이고 중심 멤버가 이영륭이다.” (정점식, 매일신문, 1965년)-(2017년 11월 9일 이영륭 인터뷰)

조혜연(現 계명대학교 명예교수)은 극재를 외유내강형의 큰 산 같은 스승으로 기억했다. 대단한 멘탈의 소유자였으며 원서(原書)가 없던 시절에도 일본책을 탐독하여 앞선 시각을 예술에 응용하였다고 한다. 다독을 한 극재는 시도 썼으며 대구에서 명강사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고 70~80년대의 기억을 더듬어 극재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2018년 7월 20일 조혜연 인터뷰)

1998년 대한민국문화훈장에 이어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과 2005년 이동훈 미술상을 수상한 극재는 이듬해인 2006년에 대전시립미술관에서 ‘극재 정점식 초대전’을 했다. 전시 기간 중에 대전시립미술관으로 가 전시된 극재의 작품들을 주의 깊게 관람한 기억이 생생하다. 극재는 은근히 그 전시회에 필자가 걸음하기를 바랐다. 극재 생전에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초대전이 열릴 당시 필자는 박사과정을 수료한지 6년째 되던 해였다. 필자에게 늦어지는 박사논문을 재촉하던 극재는 “아무리 늦어져도 남의 글 나부랭이는 베끼지 마라. 그것이 박사논문의 가치다!” 라고 하며 단호하게 의지를 다져주었다. 평생 몸담았던 학교에서 제자가 박사학위 받는 모습을 무척 보고 싶어 하던 극재에게 필자가 한 약속은 논문을 마무리하면 ‘극재 평전’을 쓰겠다고 한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10년이 걸린 필자의 박사논문은 극재 사후 3년이 지나서야 극재의 동상에 바칠 수 있었다.

일본 유학 후 만주에서 일본의 자유미술가협회 창립화가인 쯔다 세이슈를 만나(1944년) 새로운 미술이론(표현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맥락을 깨달았던 극재의 추상미술은 서구에서 출발한 미술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유입된 것을 재 흡수한 경우에 속한다. 이렇듯 문화횡단적인 극재의 추상회화는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그렇다고 왜색(倭色)이 짙은 일본화풍을 따랐던 것도 아니다. 추상미술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으로 모여든 작가들이 전쟁이 배태한 문화와 현실을 부정하고 예술로써 인간성 회복과 순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서구 추상미술의 촉발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한국의 경우와도 성격이 맞닿는다. 현실을 직시한 극재에게는 추상미술의 전개가 필연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극재 생의 말기인 2000년대의 그림은 담백한 시(詩)를 연상하게 한다. 보로메우스의 매듭처럼 얽키고설킨 것들이 걸러지고 정제된 모습이다. 1900년대의 연장선상인 2000년대의 작품들, <공간>(2000)(2002)(2003)과 <밤의 노래>(2001), <무제>(2003)(2003), <토양>(2003), <캘리그라피>(2003), <형상>(2003) 등은 색채와 간결한 붓 터치만 남겼다. 저채도의 색조차도 의식보다는 감각, 또는 무의식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조형예술을 공간예술이라고 할 때, 극재의 그림에서 포착되는 공간은 정신적인 공간인 셈이다. 1410년경 부르넬레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년)키가 단초를 마련하고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저술한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은 수평적인 공간 표현의 표본이다. 서양화가들은 그들의 선원근법을 토대로 이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현실적인 수평공간을 재현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양의 서예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지는 서양의 선원근법과는 다른 수직공간을 형성한다. 서예가들이 손에 쥔 붓을 주시하면 한결같이 수직방향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직으로 눌러 점을 찍듯이 출발하는 서예기법은 수평공간을 재현한 서양의 공간개념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기록한다. 서양화가였던 극재가 ‘1970년대를 전후해서 내 속에 잠재하고 있던 칼리그래피(colligraphy)한 충동을 드러내는 작업을 시도했다’고 한 말에서도 추측되듯이 일찍이 서예의 기본기를 다졌던 극재는 서예의 수직적인 공간개념을 이해하고 의식(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림에 응용했던 것이다. 극재가 동양과 서양의 예술 정신과 표현법이 고루 버무려진 그림을 전개시킬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극재의 유품 중에는 불교와 관련된 서적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토대로 한 극재의 예술은 동·서양의 공간 개념을 대교약졸로 펼쳐낸 것이다. 극재의 예술이 동·서양의 경계점에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극재의 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권터(Ntischke G?nter)는 테허(太虛)라는 용어와 허무(虛無)라는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키고 있다. ‘모든 것을 포괄(包括)하는 형(形)이 없는 의미로서의 태허’와 ‘니힐리즘과 절망의 의미로서의 허무’라고. 이것은 분명히 서구와 동양의 전통적인 사고(思考)에서 나온 공간(空間)에 대한 인식이다. 전자가 모든 것이 포괄되어 있는 공간인데 대해서 후자는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인 물체형성(物體形成)의 배후에 있는 공간으로서의 허무주의를 뜻한다. 태허는 모든 물체를 해체하고 이산(離散)시킨 공기나 물, 불과 같은 기(氣)를 이룬 것이지만 이 기 속에는 오행상생(오행상생)의 원리와 같은 로고스(Logos)가 있어서 다시금 만물을 조직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마치 그것은 ‘태초(太初)에 말씀(Logos)이 있었으니’ 라는 기독교 성경의 천지창조(天地創造)를 암시하는 원소적(元素的)인 의미와 같은 것이다.”『아트로포스의 가위』)

극재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보수적인 한국화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기존의 미술문화에 대한 회의와 반동이었으며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이끌어내는 기폭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을 동반한 극재의 추상회화는 리얼한 현실세계의 재현에서 일탈한 듯하지만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현실 사회에서 이해받기 어려운 이질적이고도 생경한 표현이었으나, 경계 저편이 아닌 양쪽을 동시에 버무린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와 인식에 확장을 불러온다.

예술에 정답이 있다면 모방의 종속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극재는 종속적인 삶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예술가였다. 주체적인 삶은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그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지식은 진리와 구분되며, 지식이 곧 진리라는 등식도 성립시킬 수 없다. 극재는 지식체계 위에 우뚝 서서 새로운 예술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아 나선 극재의 예술정신은 경계선 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경계는 늘 안개 속처럼 모호하고 불안했지만 숙명처럼 새로움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극재가『현실과 허상』에 10쪽 분량의「안개 속의 언어」를 기술한 이유일 것이다.

시인은 시로, 가수는 노래로 부를 人文(인간의 무늬)을 극재는 그림으로 풀어갔던 것이다. 달변가였다면 말로 풀었을 테지만 화가였던 극재는 글과 그림으로 삶을 풀어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삶의 완성을 향해 달려온 한 인간의 발자취이자 예술의 본질과 원형을 탐구한 예술가의 투지였으며, 삶과 예술의 경계선 상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꾸준히 새로움을 모색한 화가의 궤적이었다. 간간이 희열도 맛보았겠지만 대체로 무관심과 냉대를 견디는 시간이었다.

미술사학자는 미술양식이나 형식이 미술사의 어느 시기에 위치하는지를 눈여겨 볼 것이다. 미학자는 미술의 동향뿐만 아니라 작가의 예술철학과 사유까지도 가치에 포함시킬 것이다. 수집가는 작품에 매겨질 가격과 대중의 선호도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단일한 잣대로는 예술작품의 성격이나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극재의 말처럼 작품 속에는 오묘한 삶의 층차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극재의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극재야 말로 한국 회화의 자생적인 조형방향을 탐색한 화가였다는 것이다.

긴 여정이었다. 실수도 많았다. 미처 챙기지 못한 내용과 증언 등, 향후 교정과 보완을 과제로 남겨두고 <서영옥이 만난 작가 - 극재 정점식>을 15회로 마무리 한다. 고인이 된 스승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준 많은 선생님들과 ‘대구신문’에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 칠곡군 지천면 낙산리에 자리한 현대공원묘지로 가 스승 극재를 뵙고 올 생각이다.

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