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동성(異口同聲)의 궤변
이구동성(異口同聲)의 궤변
  • 승인 2018.07.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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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대다수의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입을 가지고 있다. 소화관의 시작이자, 호흡의 보조기관으로 사용되는 입을 인간도 가지고 있다. 단, 의사를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한 역할을 더한다는 것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원인은 그 ‘입’이다. 대화를 하는 것에 능숙한지, 미숙한지를 가늠하는 것도 입을 통해서다.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는 것도 아니고, 침묵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은 어렵다. 대화를 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대화의 전형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각자의 틀’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상대는 이렇게 말을 해야 해’라는 틀을 두고 대화를 한다. 상대가 달리 말을 하면, 방어를 하고 반감을 가진다.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말을 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라는 억지를 부린다. 말 그대로 이것은 억지다.

세상에서 가장 말이 안 되는 말이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다른 입을 가지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것은 궤변에 가깝다. 정치판이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비슷한 말로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것도 있다. 미묘하게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데 다르지 않다’는 억지를 부린다고 여기는 말이다. 다르지만 같다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다름’을 인정한다면, 각자의 ‘틀’을 마련해서는 곤란하다. 매번 국회에서 현안문제를 타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엉뚱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고집 때문이다. 툭하면 개점휴업인 국회라는 일터에서 국민들이 일꾼들에게 나랏일을 해달라고 사정하는 목마름은, 간절하다 못해서 이젠 분노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유유상종의 무리들이 하릴없는 반백수로 국민들의 성지(聖地)를 배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식상하고 지쳐간다. 나랏일을 한다고 거들먹거릴 때가 아니다. 나랏일은 국민을 보살피는 일이다. 뭐 하나 건수(?)만 생기면 보수와 진보, 양쪽 진영에서 굶주린 늑대들처럼 달려드는 꼴이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국민들에게 고자질하기에 급급하다. 누가 백로이고 누가 까마귀인지를 밝히는 것은 참정권을 통해 국민이 할 일이다.

진보진영의 쾌도난마로 불리던 노회찬이 떠났다. 그는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에 지난 23일 오전 9시 38분 신당동의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에서 투신해 사망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내용이다.

처음 그의 부고(訃告)를 접했을 때는 그냥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가진 먼 지인인 줄 알았다. 슬픔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두개골을 가르는듯한 충격과 공포였다. 사석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어본 사람은 그가 제 실속 못 챙기는 ‘일꾼’임을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서민의 편에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약자의 편에서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에는 청탁성은 아니었지만, 후원금을 받은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을 두고 각종 가설과 의혹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가 하면, 시신이 발견된 장소를 두고도 과학적인 견해를 내는 이도 적지 않다. 잔치국수로 조롱하는 수준급 정치인도 있었고, 유병언의 자살 조작 생존설과의 유사성까지 들먹이며, 타국으로 이송되어 잘 살고 있을 것이라는 루머까지 나돈다. 그의 죽음이 조롱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불법정치자금이 문제라고 했던가. 과연, 당시 삼성 떡값 검사들 실명공개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된 상황에서, 한 마디로 ‘힘없는 정당’의 한 후보자로부터 어떤 청탁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청탁에 관한 어떠한 부분도 인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물론 정당하지 않은 ‘검은 돈’임은 부정할 수 없다. 총선 한 달 앞두고, 선거자금 마련에 막막한 그의 절박함도 부정할 수 없다. 수수한 것이 되었건, 신고하지 않은 것이 되었건, 잘못한 일이다. 대개의 정치인이라면, 잘못한 만큼 내지는 그보다 낮은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었을 일이다.

그는 노동자였다. 노동운동을 위한 ‘가짜노동자’가 아니라,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 기술을 익혔고, 취업을 했고, 노동자와 결혼을 했고,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학력을 속이고 취업을 했으니, 위장취업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해고당했다. 필자가 만난 그는, 대구대가리에 양념을 한 찜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끝까지 노동자의 삶의 가치를 존중했던, 인심 후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40만 킬로미터를 손수 운전하고 창원과 서울을 오갔던 2007년산 구형 소나타도 주인을 잃었다. 그 이상의 죗값을 치른 그에게 적어도 양심과 책임감을 두고 면박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과연 그만큼의 양심이라도 지니고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국회의원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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