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만나본 늙음의 품격
여행길에서 만나본 늙음의 품격
  • 승인 2018.08.0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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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교육대
학교대학원 아동문
학과 강사
여행문화도 차차 바뀌고 있다. 해외에 나가면 돌아와 나눠줄 선물을 챙기던 문화도 사라져가고, 모르는 사람들끼리 단체 여행으로 묶여도 이름과 직업도 알며 친하게 지내다가 여행 후에도 연락하던 문화도 바뀌었다. 혼밥족이 늘어나는 추세의 요즈음은 열흘을 같이 다녀도 서로를 드러내는 것을 꺼려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인원 점검 때 가이드가 “1조!” “2조!” 부르면 “예!” 대답만 하면 그만이다. 아침에 새로 봐도 목례 정도만 하고 서로 조심하며 다니는 문화가 되었다. 이런 젊은이 속에 섞여 함께 여행 다니는 늙은이들은 더 조심하게 된다. ‘늙을수록 입은 다물고 주머니는 열어라’는 말이 있듯이, 함께 여행할 단체 인원이 몇 명인지 미리 알아보고 떠날 때 홍삼캔디라도 준비해 가서 가이드한테 비밀리에 부탁해두면 “일행 중에 누가 이런 홍삼캔디를 준비해오셨네요”하며 돌리고, 휴게소에서 그 나라의 망고나 체리를 사서도 누가 돌리는지 모르게 돌려 단체 분위기가 차차 부드러워지게 만드는 일에도 약간 신경 써야 할 위치다.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객에게 한 두 마디 물어보고 싶을 때 건넬 쿠키도 챙겨 다니며 국격(國格)과 늙은이의 이미지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은근히 노력하게 되는 나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다녀온 스페인 여행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어느 식당에 들렀을 때다. 한국 볶음밥과 비슷한 ‘빠이야’라는 음식이 나왔다. 생쌀보다 조금 더 익힌 쌀밥에다 채소와 샐러드를 곁들인 음식이었다. 가이드가 미리 한국사람 입맛에 맞게 쌀을 조금 더 익혀달라고 부탁했다는데도 나온 밥은 뜸을 덜 들인 쌀을 씹는 기분이라 우리들은 모두 음식을 남겼다. 그리고는 서로 눈치만 살피며 어서 불편한 식당에서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가이드대로 손님들에게 미안한 눈치였다. 그때 우리 일행 중에 머리 희끗한 여성분(아마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으리라)이 가이드 앞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 분이 우리들을 대표해서 쓴소리를 한마디쯤 하시리라 싶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같이 나이든 사람으로서 ‘아이구 머릿결도 희끗하신 분이 이 나라 음식의 특성이라 여기고 나서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며 긴장해서 지켜보고 있는데 그 분은 기어이 한마디 하셨다. “가이드 양반, 우리가 스페인 말을 모르니 우리 대신 주방장한테 이야기 좀 해 줘요” 그 말에 가이드 얼굴이 더 붉어졌다. “우리 모두 음식을 남긴 것은 맛이 없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 좀 전해 줘요. 우리가 점심 먹은 지가 네 시간밖에 안 지나서 아직 소화가 안 되어서 그렇다고. 음식은 맛있는데 남겨서 미안하구만…” 그 분이 하는 뜻밖의 말에 우리 일행은 모두 놀랐다. 가이드도 활짝 웃으며 일어서서 주방장을 불러 전했고 주방장은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하며 싱긋 웃었다. 사람들은 주방장에게 보내는 박수인 동시에 그녀에게 보내는 박수를 쳐주며 즐거워했다. 순간, 자리로 돌아오는 그 분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품격 있게 휘날리며 뒤뚱거리던 걸음걸이마저 거인의 걸음걸이처럼 당당하게 보였다. 서로가 누군지,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인지는 덮어두었지만 그 분은 틀림없이 기관의 장을 지낸 분이라 여겨졌다. 학교의 기관장만 하더라도 구성원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자리이다.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이 음식은…” 하며 칭찬의 말이 아니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학교장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영양사나 조리사가 서운해 하거나 기죽는 일이 없도록 두루 마음 써 살펴봐야 하는 자리이기에. 나는 스페인 식당을 나오면서 그 분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고 노사연의 ‘바램’ 노래 한 소절을 존경의 의미로 불러드렸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평소 구성원 심정을 깊이 헤아리며 산 사람이 아니면 그런 자리에서 단체의 분위기와 가이드의 처지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의 처지까지 고려할 수 있는 아량은 없었으리라.

비행기에서도 연륜의 품격으로 일하는 승무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행기 승무원이 되려면 항공사에서 선호하는 날씬한 몸매에 자기가 취직하려는 항공사 취향에 맞는 얼굴형으로 성형수술까지 해야 취업이 된다는 판국인데 캐나다 소속의 승무원은 할머니였다. 친구의 아들이 박사과정 공부를 하러 다니다 보니 식사가 나와도 귀찮아서 안 먹고 잠을 잤단다. 할머니 승무원이 다가와 깨우며 먹어보라고 권해서 싫다고 했지만 계속 웃으며 포크를 들려주는 바람에 할 수 없어 먹었단다. 나중에 돌아와 도시락을 비운 것을 보고 엄지척을 해주며 어머니 미소로 고맙다며 환하게 웃더란다. 그 뿐 아니라 잠든 엄마 옆에서 아기가 칭얼대자 아기 엄마를 깨우지 않고 아기 기저귀를 들추어보며 품에 안고 달래주더란다. 연륜이 정을 내는 일에 푸근한 깊이가 있음을 볼 줄 알고 활용하는 캐나다가 품격 있는 나라로 여겨졌다.

흔히들,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과거 기억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나이 들어도 남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건강 챙기고 일을 즐기며 산다면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찬란하게 다가올 날만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매 순간을 찬란히 빛나는 날로 살아가는 것이 연륜의 품격이겠다. 젊은이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묵은 지 맛의 깊이 있는 품격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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