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총각 말문 터졌데이
그 총각 말문 터졌데이
  • 승인 2018.08.1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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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대구경북 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일요일 새벽, 수목원의 작은 숲속 길은 호젓하고 여유가 있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와 도랑으로 흘러 내리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한다. 겨자색깔의 탱자, 산딸기, 앵두, 덜 익은 초록감들이 땅바닥에 나부라져 있다. 어젯밤 비바람이 지나간 흔적이다. 가마솥더위도 한 풀 꺾였나 보다. 입추가 지나니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다. 가끔 집근처에 있는 수목원에서 이른 아침 산책을 즐기곤 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풀냄새를 맡으며 아침 풍경을 감상하니 소확행이 따로 없다.

어제 오후, 베트남에 사는 장모님의 초청비자 진행상황이 궁금해서 전화한 G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아내는 유난히 정이 많고 싹싹했다. 십여년 전으로 기억된다. 그가 사는 이웃마을 할머니의 소개로 G씨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농촌 총각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안방 앞 마루에 앉아계신 할머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G씨를 추천한 할머니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G씨의 부모님과 마을 할머니들을 소개했다. 워낙 인심이 좋은 집안이라 마을 할머니들이 G씨를 장가보내기 위해 모인 것이다. 결혼할 당사자인 총각이 안보여 내가 당황해하자, 소개한 할머니가 신랑은 입이 무겁고 점잖아서 부모님과 얘기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G씨가 불쑥 나타났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인상이 선하고 잘 생긴 용모였다. “제 결혼인데 저하고 얘기 해야죠” 그 말이 떨어지자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치며 반가워 하셨다. “아이구, 이제는 장가가려나 보다. 생전 입 한번 떼는 걸 못봤는데.” 하면서 그의 손을 끌었다. 나는 그가 무안해 할까봐 내일 사무실에서 상담하자고 약속했다.

다음날, 그가 겸연쩍은 모습으로 사무실에 왔다. “이제는 저도 제 자신의 행복을 찾고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그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대학시절에 사귀던 여학생과 군대 가면서 헤어지게 되었고, 그 이후 실연의 아픔으로 말수가 적어졌다 한다. 직장생활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집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주로 보냈다. 나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후련하다고 했다. 그는 의외로 정감있게 말을 많이 했다. 그에게 맞는 배우자는 그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모성애가 있는 여성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상냥하고 애교 많고 정 많은 현재의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결혼하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후, 소개한 할머니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댁, 정말 좋은 일 했데이, 그 총각 말문 터졌데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평소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외골수로만 지내던 그가 변화한 것이다. 결혼을 통해서 그의 삶은 역동적으로 바뀌었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베트남에서 신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주의 기운을 한 몸에 받은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움츠리고 있던 세포들이 그의 몸속에서 스물스물 요동치며 밖으로 기어 나오는 듯 했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해 보였던 인상은 사라지고, 자신감에 찬 멋진 남성이 눈앞에 서 있었다. 신부의 표정에도 설레임이 보였다. 새벽에 내리는 이슬처럼, 소리없이 두 사람에게 사랑이 다가온 것이다. 사랑의 힘이 이렇게 위대할 수가 있을까? 30년 동안 고목처럼 속으로만 나이테를 켜던 한 남자의 인생이 달라졌다.

이 세상에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머니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이웃 간의 사랑, 일에 대한 사랑…. 많고 많은 사랑이 있지만 남녀 간의 사랑만큼 아름답고 에로틱한 사랑이 있을까? 베트남 장모님 초청 문제로 분주한 그의 전화는 자기 앞의 생을 잘 가꾸어가는 성숙한 남자의 밝고 씩씩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의 예쁜 딸아이의 아빠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한 남자의 일생을 기적처럼 바꾼 베트남 아내의 내조는 메마른 우리 사회에 한줄기 빛과 같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을 조용히 음미해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중략…/그의 과거와 현재와/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국 만리 낯선 땅에 와서 사랑이라는 귀한 인연을 소중히 가꾸어 가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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