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가르는 은회색 빙하 여행의 고단함 달래주네
설산 가르는 은회색 빙하 여행의 고단함 달래주네
  • 박윤수
  • 승인 2018.08.16 2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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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람 하이웨이 훈자
해발 2,438m에 자리잡은 훈자
산봉우리 둘러싸여 절경 연출
‘천상의 수로길’ 산책로 장관
비탈길따라 흐르는 호퍼 빙하
자갈·철분 머금고 골짜기 채워
주민 미소·친절 덕에 여유 만끽

 

 
호퍼빙하.
호퍼빙하.

 

 

 

박윤수의 길따라 세계로 - 카라코람 하이웨이 <4> 훈자

훈자(Hunza)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붉은꽃과 하얀꽃이 만발했다. 체리, 자두꽃이 산과 들을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살구꽃은? 살구꽃 피는 계절에 맞춰 일정을 잡았는데……. 저 멀리 설산 아래 연분홍 살구꽃이 보이긴 했다. 이상 기온으로 이곳 훈자에는 살구꽃이 만개 시기를 지나 꽃이 끝나가는 듯했다.

훈자 지역의 중심도시 카리마바드에 도착한 시각은 해가 서쪽 하늘에 걸리는 때였다. 비탈에 계단식으로 층층이 집들이 들어서 있어, 우리가 도착한 호텔에서는 훈자 밸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포플러나무가 막 푸르러가고 살구꽃은 지고 있었다. 카라코람산맥이 석양에 물들어 가고 멀리 높은 산의 하얀 눈은 황금색을 띠고 있다.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했던 가이드는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갔다가 다시 우리 일행과 합류했다. 그는 호텔 주방을 드나들며 오랜만에 맛난 한식을 만들어 여행의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썼다. 이슬람이 국교인 파키스탄에서도 이곳 카리마바드에는 모스크가 없다. 훈자강 건너 나가르 지역에서는 예배시각에 맞추어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이곳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훈자 지역 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아, 수니파 이외에 여러 이슬람 종파가 존재한다고 한다.

또한 여러 가지 과일이 많이 나는 이곳에는 과일을 발효시킨 술이 있다. 파키스탄 물가에 비해서는 상당히 비싸다. 1.8리터 생수통 한 병에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였으며, 알코올 도수는 30도쯤 됐다. 각종 과일로 만들어서인지, 술이 귀한 나라여서인지 아주 달콤하고 맛깔났다. 훈자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오랜만에 맛보는 푸짐한 한식, 그리고 이곳에서 구한 맛있는 술로 저녁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늦은 밤 식당에서 나와 하늘을 보니 마치 소금을 뿌려 놓은 듯 수많은 별이 빤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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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수로길이라는 훈자의 마을길.

 



파키스탄 잠무카슈미르에 속한 훈자는 해발 2,438m에 위치하고 있다. 훈자 왕국은 11세기 무렵 알티트, 발티트, 가네시 등 세 마을이 모여 만든 부족 국가였다. 1761년부터 1937년까지 신장 위구르족에게 조세를 바쳤으며 1947년 이후 파키스탄이 지배하고 있다. 지금도 왕은 있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다고 한다. 현재 훈자는 알리아바드, 카리마바드, 가네시, 알티트, 나가르 등 여러 마을을 통틀어 부르는 지역 이름이다.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봄이 되면 설산을 배경으로 마을을 뒤덮는 연한 핑크빛 살구꽃, 하얀 체리꽃, 분홍 자두꽃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은회색 물에 광물질이 많이 함유된 듯 신비스러운 색을 지닌, 빙하의 압력에 암석이 미세하게 녹아든 ‘훈자 워터(Hunza Water)’는 마을의 거미줄 같은 수로를 흐른다. 주민들은 이 물을 생활용수, 음용수로 사용한다.

카리마바드는 주위에 라카포시(7천788m), 울타르(7천388m) 등 6천m 이상의 높은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동안 울타르봉에서 산사태가 나서 목동들 몇 사람이 매몰돼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어슬렁거리며 동네길을 걸어본다. 오늘은 알티트 성채가 있는 이글스 네스트(Eagle’s Nest)로 가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간단히 짐을 꾸려 놓고 훈자 현지인이 만드는 한국식 수제비(3,500원)를 먹기로 했다. 이곳까지 한국의 음식이 전해져 설산을 바라보며 감자 수제비를 먹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를 안내한 이가 이곳에 지인들에게 여러 가지 한식을 전수해 준 것 같았다. 이글스 네스트는 카리마바드에서 동쪽으로 4km쯤 떨어져 있다. 훈자 계곡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찌감치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베란다로 나와 핸드폰에 저장한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앉아 해넘이를 바라보다 숙소 뒤 독수리 바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아스라한 동쪽의 골든 피크(7천27m)와 디란피크(7천266m)가 지는 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훈자강 건너편 마을 나가르(Nagar)에서 아스라이 아잔 소리가 들려온다. 밤이 이슥하도록 호텔 베란다에서 훈자의 야경에 빠져든다. 해발 3천m의 쌀쌀한 날씨, 이글스 네스트에도 막 살구꽃이 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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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과 살구꽃.


호텔에서 제공한 아침을 먹고 두 시간 예정으로 트레킹을 나선다. 간단한 옷차림으로 물 한 통 들고 마을 길을 따라 산기슭을 오른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숨이 가빠진다. 밭에 심은 감자 줄기가 푸르름을 더하고 마을 곳곳에 흐드러진 살구꽃, 그리고 언덕 위에서 보이는 태양 빛에 반짝이는 설산들……. 보이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풍광이다. 돌아오는 길에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몇 개 샀다. 상큼한 맛을 기대했지만 생각만큼은 아니다.

훈자에서 26㎞ 떨어진 호퍼마을로 살구꽃 구경을 가기로 했다. 훈자에서 포장, 비포장길을 달려 도착한 나가르 지역의 호퍼마을은 살구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호퍼마을에 도착해 식당에 점심을 주문하고 한 시간 정도 호퍼 빙하 트레킹을 했다. 빙하는 장구한 세월을 흘러내린 듯 각종 자갈과 철분이 가득한 시커먼 모래를 뒤덮어 쓰고 골짜기를 채우고 있었다. 마을에서 삼십 분 정도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의 비탈길을 위태위태하게 내려가는데 갑자기 서너 명의 동네 아이들이 몰려오더니 길을 안내한다.

삐죽빼죽한 빙하 사이사이로 크레바스를 피하며 발 디딜 곳을 안내한다. 혹시 우리에게 해를 끼칠까 신경이 쓰였지만 아이들이 안내한 길을 따라 무사히 빙하 속으로 들어가 사진도 찍고 빙하도 만져 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빙하 트레킹을 나서는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용돈을 버는 아이들이었다.

빙하에서 다시 마을로 올라오는 길은 가팔라서 몇 번 숨을 돌려야 했다. 두 시간 만에 식당으로 돌아와 미리 주문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양옆은 살구꽃 천지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살구꽃을 보았다. 살구꽃 가지를 꺾어 모자챙에 꽂기도 하며 살구꽃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고 훈자강을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이글스네스트호텔에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카리마바드로 향했다. 이글스네스트에서 아랫길로 내려가 왼편으로 들어서면 티벳의 시골 촌락처럼 흙벽으로 지어진 아기자기한 마을 알티트에 닿는다. 훈자 왕국의 마지막 궁전 알티트가 위치한 곳이다. 훈자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지어진 알티트 성채는 티벳 기술자들이 와서 지은 건물로 왕족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영국 식민통치 시절에는 3층에 별도의 회랑을 만들어 영국 관리자들이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알티트 성채를 내려와 파키스탄 현지 안내자를 따라가며 현지인들에게 “앗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신의 영광이 있기를)”이라는 인사를 하면 “와 알레이쿰 앗 살람”이라며 응답을 한다.

마을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네들이 사는 집들은 흙벽돌에 진흙을 바른 벽체에 미루나무로 천장 서까래를 치고 위에 진흙으로 마무리 한 토담집으로 사람들이 서로 겨우 지나칠 수 있는 정도의 골목길을 마주하고 지어져 있다.

다시 카리마바드의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밀린 빨래를 하였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나 세면기에서 나오는 물은 빙하수로 회색을 띠고 있다. 몇몇은 세수나 양치를 생수를 사서 하고 있었으나, 나는 빙하수로 몸도 씻고 양치도 하고 속 옷도 빨았다. 보기와는 다르게 전혀 이물감이 없었다. 매일 저녁 이곳의 특산 밀주를 사서 저녁 식사와 함께 먹었다.

라카포시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계획한 날 아침, 라카포시에 많은 눈이 내려 위험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래서 가까운 미나핀마을로가서 피산 빙하트레킹을 하기로 하였다. 일행 중 원하는 이들만 차를 빌려 미나핀 마을로 향했다. 지프차로 한 시간 이동하여 현지 안내자를 만나 피산빙하가 흘러내리는 길에 올랐다. 빙하에 의해 침식 칼날 같은 길을 따라 피산빙하를 오르는데, 트레킹 시즌을 준비하는 듯 마을 사람들이 임도를 따라 공사를 하고 있었다. 빙하의 끝단을 보기 위해 자갈과 모래, 너덜이 있는 길을 두 시간 올랐다. 빙하의 끝은 호퍼 빙하처럼 시커먼 모래와 자갈로 덮혀 멀리서 보면 자갈 더미 같다. 그러나 녹아서 내려오는 물은 우유에 숯가루를 탄 듯 은은한 회색빛이다.

훈자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원래 계획으로는 하루 정도 더 머물 생각이었는데 국경 통과의 변수로 인하여 일찍 중국으로 건너가 카쉬가르에서 여유를 갖기로 했다. 워낙 오지이다 보니 교통편과 지역 상황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훈자를 떠나기 전 우리 일행은 정성을 모아 지역 학교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여행경비를 조금씩 모아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있는 공립 여학교를 방문했다. 우리를 가이드 해주고 있는 이가 학생 4명을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하기로 한 전날 울타르피크에서 산사태로 인하여 5명의 목동이 매몰되었다고 한다. 방문한 학교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학생들의 노래와 율동을 준비하였다. 흥겨운 노래지만 마을 전체가 어제의 사고로 비통해하고 마을 사람들이 구조에 나서는 상황이라 잠시 학교에 머물다가 이내 작별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 아이를 후원하기로 하고 일 년간의 학비와 교재비 등으로 후원금 100달러를 기탁했다.

학교를 나와 피자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발티트성채로 향했다. 발티트성채는 과거 훈자 왕이 티베트령의 소왕국인 발티스탄의 공주와 결혼했는데 당시 공주가 티베트 건축목수들을 데려와 성을 지었기 때문에 티베트 건축물과 건축기법이 비슷하다. 13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본래 단층이었으나 여러 차례 증축해 현재와 같은 3층 구조가 되었다. 훈자 왕이 1945년 알티트성으로 옮긴 뒤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원형 복원작업을 거쳐 1996년부터 관광객들에게 공개했다. 아직도 외부는 복원작업 중이었다.

발티트성을 나와 천상의 수로길이라는 훈자의 마을길을 걷는다. 폭이 1m 남짓 되는 수로는 마을의 구석구석을 연결한다. 흐르는듯 흐르지 않는듯한 빙하수는 도화꽃 몇 송이를 품고, 때로는 살구꽃을 이고 천천히 마을을 휘돈다. 훈자대학까지 한 시간 정도 걸어가서 다시 숙소까지 걸어온다. 얕은 집들이 수로길을 따라 이어진다. 막 개발을 시작한 듯 먼지 나는 길옆에 새로 이층집을 짓는 곳도 있고, 군데군데 공터에는 어린아이들이 뛰놀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영어로 인사를 하기도 한다. 여행자들에게 익숙한지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와 사진을 같이 찍기도 한다. 넉살 좋은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리고 가서 과자를 하나씩 사주는 사람도 있다.

훈자는 이런 맛에 여행자들이 오는 곳인가 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그냥 느릿느릿,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동네길을 빙하수가 흐르는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하루해가 어느덧 기울어간다.

박윤수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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